한국영화, 올해 100만 돌파 13편, 이 중 5편만 수익 내
‘스즈메’ 등 일본 애니 열풍… 할리우드 히어로물 고전
2023년 세밑을 향해 가는 가운데 영화계엔 오랜만에 낭보가 전해졌다. 김성수 감독의 ‘12·12 군사반란’을 소재로 한 ‘서울의 봄’이 ‘천만 영화’ 대열에 새롭게 합류하게 된 것. 덕분에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온 한국영화가 희망의 불씨를 남기며 올해를 마감하게 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후 여전히 이전의 활기를 되찾지 못하고 있는 극장가의 올해 특징은 한국영화와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영화의 부진, 재패니메이션(일본 애니메이션)의 약진으로 요약된다.
부진 속 희망 남긴 한국영화
올해 전반적인 한국영화의 흥행 성적은 우울하다. 올 개봉작 중 100만을 돌파한 영화는 25편으로, 이 중 한국영화는 △‘서울의 봄’(1100만·이하 27일 기준) △‘범죄도시3’(1068만) △‘밀수’(514만) △‘콘크리트 유토피아’(384만) △‘30일’(216만)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191만) △‘교섭’(172만) △‘노량: 죽음의 바다’(253만) △‘잠’(147만) △‘달짝지근해: 7510’(138만) △‘드림’(112만) △‘비공식작전’(105만) △‘1947 보스톤’(102만) 등 13편에 그친다.
이 중에서도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범죄도시3’, ‘서울의 봄’, ‘밀수’, ‘30일’, ‘잠’ 등 단 5편뿐이다. “어려운 시기인 만큼 관객들이 극장을 많이 찾아주길 바란다”는 감독의 당부는 관계자 시사회의 빠지지 않는 멘트가 됐고, 제작자들 사이에선 “영화를 얼마나 더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비관적인 얘기도 종종 나왔다.
한국영화 부흥을 위한 정부 핵심기관인 영화진흥위원회의 박기용 위원장 역시 “올해 상반기 제작 신작이 8∼9편밖에 안 되고, 하반기는 더 줄어들고 내년 설 시즌에 한국영화가 없을 수도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고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이런 위기의 원인으로는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OTT)의 보편화와 극장 관람료 인상, 코로나19 이전 제작된 재고 콘텐츠 공급이 꼽힌다. OTT 콘텐츠가 넘쳐나면서 꼭 극장에 가지 않아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된 데다가 극장이 코로나19로 인해 생긴 적자를 만회한다며 급하게 관람료를 인상하면서 극장을 향하는 관객의 발걸음이 줄었다는 게 대체적인 영화계의 평가다.
영웅의 몰락, 일본 애니의 붐
외화는 지난해보다 시장이 성장했지만, 마블과 DC코믹스 기반의 슈퍼히어로 영화는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지난 5월 어린이날 앞두고 개봉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볼륨3’이 420만 관객을 모으며 인기를 끌었을 뿐 나머지 ‘영웅’은 혹독한 시련에 맞닥뜨렸다.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는 155만 관객이 들었고, 애니메이션인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92만명이 관람했다. 이밖에 ‘트랜스포머: 비스트의 서막’, ‘더 마블스’, ‘플래시’, 샤잠’ 등은 아이맥스 상영에도 100만명을 넘기지 못했다. 한때 한국 극장가를 주름잡았던 왕년의 영웅들을 찾는 이가 이젠 별로 없다.
반면 ‘재패니메이션’으로 불리는 일본 애니메이션은 그 어느 때보다 큰 인기를 누렸다. 올해 초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중년 관객의 향수를 자극한 데 이어 10·20대 연령층까지 끌어들이며 478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영화는 최근 재상영이 이뤄지는 등 한 관객이 여러 번 보는 ‘n차 관람’의 덕을 톡톡히 봤다. 그만큼 팬심이 두텁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이어 지난 3월8일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스즈메의 문단속’은 557만명이 관람하며, 재패니메이션은 물론 일본 영화 중 최다 관객 기록을 세웠다. 이는 올해 전체 개봉 영화 흥행 4위에 해당하는 성적이다.
난해하다는 평가 속에 낮은 평점을 받았음에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도 200만명이 관람했다. 성공한 IP(지식재산권)의 현대적 재해석 등 탄탄한 이야기와 유명 감독에 대한 관심, 뛰어난 색채가 일본 애니의 성공을 이끈 것으로 평가된다.
깐깐한 관객… 콘텐츠 질에 달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11월까지 전체 관객 수는 1억844만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9.9%(980만명) 증가했고, 누적 매출액은 1조971억원으로 전년 동기 9.4% 늘었다. 그러나 여전히 코로나19 이전인 2017∼2019년 평균과 비교하면 관객과 매출액은 각각 54.7%, 66.8% 수준에 그친다. 특히 같은 기간 전체 영화 중 한국영화의 누적 관객과 매출액은 전년보다도 각각 18%, 19.8%나 감소했다. 12월에는 ‘서울의 봄’과 ‘노량’의 인기에 힘입어 수치가 보다 좋아졌을 것으로 관측되지만, 코로나19 이전 수준에 이르기는 역부족이다.
이처럼 한국영화가 고전하는 와중에도 ‘범죄도시3’과 ‘서울의 봄’이 1000만을 넘긴 것, ‘30일’이나 ‘잠’ 같은 중급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돌파한 것은 성과다. 반면 제작비 280억원을 들인 대작인 ‘더 문’이 누적 관객 51만명, 210억원 투입된 ‘1947 보스톤’이 102만명, 역시 200억원 이상이 들어간 ‘비공식작전’이 105만명의 관객밖에 모으지 못한 데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극장 관계자들은 대작 영화의 실패에 대해 “진부함과 소위 신파를 관객들이 참지 못하는 듯하다”, “개봉 시기가 겹치며 관객이 분산된 것” 등의 해석을 내놓는다. 더는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소위 ‘대작’이라고 홍보하는 영화가 흥행을 보장하지 않는다. 높은 완성도와 새로운 이야기에 관객이 ‘선별적’으로 몰리는 게 요즘 분위기다.
이런 경향은 한국영화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영화에서도 확인된다. ‘식상하다’ 혹은 ‘이야기가 복잡하다’, ‘유치하다’는 등의 부정적 후기가 적지 않은데, 돈을 들인 티를 내며 영화의 외면을 화려하게 꾸몄지만 내용은 별것 없다는 비판이다.
더하자면 올해 ‘정치적 올바름’(PC)을 내세우며 원작이나 역할을 비튼 영화에 대해서도 박한 평가가 내려졌다. 흑인 여배우를 인어공주로 기용한 디즈니 영화 ‘인어공주’는 64만 관객이 들었고, 바비 인형을 소재로 한 마고 로비 주연의 ‘바비’는 58만명 관람에 그쳤다. 디즈니 애니 ‘엘리멘탈’이 올해 흥행 3위에 해당하는 723만 관객을 모은 것도 눈에 띈다. 영화는 개봉 2주차부터 관객이 늘어나는 ‘역주행’으로 입소문의 힘을 증명했다. 한국계 감독이 담아낸 동양 정서가 국내에서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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