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굴복… 병자호란 ‘치욕의 역사’
올해 2023년 12월 역대급 한파가 몰아치면서,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직접 경험하였다.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추웠던 겨울은 1636년 12월이었다. 추위와 함께 청나라의 침략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기 때문이다. 12월 청군 선발대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병자호란이 시작되었다. 인조는 급하게 창덕궁을 빠져나와 강화도로 가는 피난길에 나섰다. 그러나 청군의 빠른 진격 속에 강화도로 가는 길목인 양화나루가 봉쇄되었고, 인조는 발길을 되돌려야만 했다. “왕이 돌아와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이때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났으므로 시신(侍臣) 중에는 간혹 도보로 따르는 자도 있었으며, 성안 백성은 부자, 형제, 부부가 서로 흩어져 그들의 통곡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고 ‘인조실록’은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대가(大駕)가 새벽에 산성을 출발하여 강도로 향하려 하였다. 이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산길이 얼어붙어 미끄러워 말이 발을 디디지 못하였으므로, 상이 말에서 내려 걸었다”는 기록에서는 눈보라가 심하게 내렸던 그날의 모습이 보인다.
청 태종이 12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쳐들어온 전쟁에서, 청군은 인조가 피난처로 삼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압박했다. 산성 창고의 곡식은 다만 1만6000여섬이 있어 1만여 군사의 한 달 동안의 양식에 불과하였고, 한겨울의 맹추위는 산성에 고립된 조선군의 사기를 더욱 떨어지게 하였다. “성중에 온갖 것이 다 군색해지고 말과 소가 모두 죽었으며 살아 있는 것은 굶주림이 심하여 서로 그 꼬리를 뜯어 먹었다”는 기록이나, 인조도 침구가 없어 옷을 벗지 않고 잠을 청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12월24일에는 진눈깨비가 그치지 않자, 인조는 세자와 승지, 사관을 거느리고 후원에서 날씨가 개기를 빌었다. 향을 사르고 사배(四拜)를 한 후에는 “이 고립된 성에 들어와서 믿는 것은 하늘뿐인데, 찬비가 갑자기 내려 모두 흠뻑 젖었으니 끝내는 반드시 얼어 죽고 말 것입니다. 내 한 몸이야 죽어도 애석하지 않지만 백관과 만백성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날을 개게 하여 우리 신민을 살려 주소서”라면서 그대로 땅에 엎드려 통곡하였다.
청군은 소나무 가지와 잡목을 성 밖에 쌓아 6∼7일 동안 삥 둘러싸 둘레 100여리, 서너 길 높이의 외성(外城)을 만들고 성에 있는 조선군을 압박해 나갔다. 당시의 강추위도 이전보다는 훨씬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1637년 1월 ‘연려실기술’의 기록에는 “늦겨울의 혹독한 찬 기운이 전에 없던 것이었다. 적이 움직이면 바람이 일어나고 적이 정지하면 바람이 그치며 초겨울에 온 눈이 지금까지 녹지 않았는데, 장수와 모든 군사가 항상 추운 곳에 거처하여 얼굴빛이 푸르고 검어서 사람의 형상 같지 않고 살이 터지고 손가락이 빠져 참혹함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고 하여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이던 그날의 비참했던 상황을 증언해 주고 있다.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의 압박이 이어지자,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론(主和論)의 목소리가 커졌다. 주화론의 중심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은 척화론의 대표 김상헌(金尙憲)과 남한산성에서 강하게 충돌했다. 2017년에 개봉된 영화 남한산성은 두 사람의 대립을 중심으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모습을 주제로 다루었다. 최명길은 인조의 동의하에 항복을 청하는 국서를 작성하였고, 삼전도(三田渡: 현재의 송파구 석촌호수 일대)에 지휘 본부를 차린 청나라 진영을 오가며 협상을 성사시켰다. 1637년 1월30일 인조는 47일 만에 남한산성을 내려와 청 태종에게 항복을 청하고, 군신(君臣) 관계를 맺으면서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혹독한 추위와 더불어, 오랑캐라고 무시하였던 청나라 황제에게 조선의 왕이 치욕스러운 항복을 한 아픔 때문일까? 1636년 12월 그해 겨울은 역사 속 어느 해보다도 추웠던 겨울로 기억되고 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