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같은 아이들 잘자라란 의미
의료진들은 ‘도토리하우스’라 불러
소아청소년 환자의 단기 돌봄 지원
전문 인력이 24시간 아이 곁 지켜
가족들은 그사이 휴식·에너지 충전
16개 병상… 지금까지 총 143명 머물러
임신 막막했던 중증 쌍둥이 엄마
“센터 덕에 막내 출산… 한줄기 빛”
간호사들 “즐겁게 지내다 갔으면”
설을 맞아 모두 들뜬 마음으로 고향으로 향하던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넥슨어린이통합케어센터(도토리하우스)에서는 떡과 식혜만 놓인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지난해 11월 개관 이후 맞은 ‘100일 파티’였다.
의료진은 아주 짧은 시간 떡을 먹으며 서로에게 새해 덕담을 건넸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다들 모니터 앞으로, 병상 앞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연휴 내내 도토리하우스의 불은 24시간 환하게 켜졌다.
거동이 불편한 중증 소아환자 ‘단기 돌봄’을 위한 목적으로 문을 연 이후 16개 병상은 늘 붐볐다. 도토리 같은 아이들이 참나무처럼 듬직하게 자랄 때까지 보살피겠다는 마음을 담은 ‘도토리하우스’라는 이름처럼, 100일간 이 작은 공간은 눈물과 한숨보다는 위로와 웃음이 넘치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기댈 곳이 되어준 도토리하우스”
“75일 전에 막내가 태어났어요. 막내는 아직 모유 수유 중인데, 35개월 된 쌍둥이가 누워만 있으니, 신생아 3명을 키우는 셈이에요. 우는 막내 달래느라 아기띠를 안고 있을 때 예온·하온이가 그르렁그르렁 소리를 내면 아기 안은 채로 석션(가래 흡입)하고, 모유 수유하면서도 석션하고…. 이런 게 일상이에요.”
명절을 앞둔 지난달 31일 찾은 도토리하우스에선 35개월 쌍둥이 형제 하온이와 예온이의 입소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쌍둥이가 도착하자마자 의료진은 바쁘게 움직였다. 침대에 아이들을 눕힌 후 가드를 올리고, 양말을 벗겨 산소포화도 측정기를 끼우고, 석션을 해주고, 위루관(구강으로 음식 섭취가 어려운 환자 위장에 음식을 직접 주입하는 관)을 연결하고, 모니터를 통해 아이들의 활력 징후를 확인했다. 석션 중 예온이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꿈틀거리자 “아유, 미안해. 미안해. 괜찮아”라고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려주기도 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아이들의 상태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한편 부모를 통해 아이들의 분유량, 약제 투약량과 변비, 피부 상태를 꼼꼼히 체크했다.
“예온이 몸무게가 5.5㎏밖에 안 되네요. 그동안 잘 못 먹었나요?”
도토리하우스에서 근무하는 이지원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가 묻자 엄마 김수지(35)씨가 “잘 못 먹고 토해서, 살이 더 빠졌다. 이제 막내 몸무게보다 작다”며 의료진을 감싸안으며 맞장구를 쳤다. 김씨는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을 볼 때마다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하온이와 예온이가 도토리하우스 ‘단골’인 탓이다.
예온·하온이의 진단명은 발달성 뇌전증 뇌병변 73번. 당시 국내에서 처음 진단이 나온 극희귀질환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3, 4번째였다. 그때부터 35개월이 되는 지금까지, 김씨 가족은 온 가족이 거실에서 생활하며 아이들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픈 아이들을 키우는 와중에, 지난해 초 임신을 확인한 김씨 부부는 기쁨보다 고민이 너무 컸다.
“쌍둥이를 낳았을 때 ‘축하해’란 말보다 ‘괜찮아?’라는 말만 들었어요. 아프지 않은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욕심도 났지만, 쌍둥이에게 소홀해질까 봐 미안함도 들었고요. 혹시나 막내도 아프지 않을까 걱정도 됐어요. 겨우 낳기로 결심을 했는데, 출산 기간 쌍둥이 맡길 곳이 없는 거예요. 너무 답답했는데 ‘도토리하우스’가 개소하며 덕분에 출산할 수 있었어요.”
그가 아이들 사진을 언론에 허락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출산조차 불가능했던 막막한 상황에서 “도토리하우스는 깜깜한 터널에서 만난 한 줄기 빛”이기 때문이다.
또다시 방문한 도토리하우스, 이번 ‘휴가’에서 부부는 다 늦은 산후 조리와 함께 막내와 ‘외출과 외식’을 하는 3박4일의 소박한 목표를 세웠다. “일주일 푹 쉬면 안 되냐”는 질문에 “꼭 필요한 순간을 위해 ‘아껴 써야 한다’”고 했다.
◆아픈 아이에게 매달린 ‘벼랑 끝 가족’들
예온·하온이처럼 많은 아이와 가족이 도토리하우스에서 숨 쉴 틈을 찾았다. 지난 9일까지 총 143명의 아이가 도토리하우스에 머물렀다.
특히 2층 목욕실은 ‘신세계’다. 위루관에, 인공호흡기에, 다양한 ‘줄’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아이들이라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기만 하다 보니 목욕 경험이 아예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첫 ‘통목욕’을 하다가 때가 칼국수처럼 밀려 나오는 모습에 의료진도 깜짝 놀랐다. 며칠간의 휴가 후 돌아온 부모는 뽀송뽀송해진 아이들을 보면 함박웃음을 짓는다.
이지원 교수는 “처음 목욕을 한 아이들이 많아서 때가 얼마나 나오는지 정말 깜짝 놀랐다”고 웃으며 “퇴소할 때 부모님들이 ‘애가 더 예뻐졌다’며 밝은 표정을 지으실 때 저절로 흐뭇해진다. 퇴소 후에 감사의 편지도 참 많이 받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여전히 도움이 필요한 수많은 아이가 도토리하우스에 들어오지 못했다. 센터 입소를 위해서는 △자발적 이동이 어려움 △인공호흡기·산소흡입·기도흡인·경장영양·자가도뇨·가정정맥영양 등 필요 △급성기 질환이 없는 안정 상태 등 3가지 기준을 동시에 충족해야 한다. 정부에서 추산하는 도토리하우스를 이용할 수 있는 중증 소아환아는 4000여명. 입소를 위해 신청서를 작성한 사람들만 100명이 넘는다.
◆의료진 ‘덕분에’
소아 병동에 오래 근무한 간호사들도 차이를 느낀다. 일반 병동과 너무 다르다. 처음에는 안전하게 돌려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너무 컸다. 첫 한두 달은 모두 악몽에 시달렸다. 아이가 잘못된다거나 센터 계단이 불에 타서 발만 동동 구르는 꿈도 꿨다.
류민주 수간호사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기왕이면 아이들이 즐겁게 지내다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커졌다”고 변화를 설명했다.
무조건 불안해하기보다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좀 더 신경 쓰기로. 안겨 있기 좋아하는 ‘사람 손 탄’ 아이는 복도에 데리고 나와 안아주기도 하고, 노래를 듣기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해 자원봉사자들이 센터에 방문해 실로폰 소리, 기타 소리를 직접 들려주기도 했다.
“우리는 환자라고 부르지 않아요. 이름을 불러줘요. 아이들 얼굴을 한번 보세요. 정말 볼수록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뇌질환인 아이들이라 아무것도 모를 것 같죠? 애들이 다 알아요. 온도, 습도 바뀐 거 귀신같이 알아요. 며칠 안 보이던 엄마가 오면 (기쁨에)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도 있어요.”(류민주 수간호사)
모든 부모는 소위 ‘100일의 기적’을 경험한다. 1∼2시간 간격으로 깨고 먹는 신생아 ‘극한의 돌봄’ 100일이 지나면 아이들이 통잠을 자면서 일상회복이 가능한 ‘기적’이다. 이제 100일을 맞은 도토리하우스, 의료진의 공통된 소망은 하나였다. 몇 년째, 길게는 몇십 년째 이를 경험하지 못한 부모들에게 일상을 돌려주는 기적을 일으키고 싶다는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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