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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어귀 산책길에서 늘 마주치던 빨간 우체통이 사라졌다. 손편지를 쓰는 사람들이 점점 없어지면서 우체통이 본래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옛 서정시 같은 빨간 우체통을 철거해버렸다. 우체통이 통째로 사라진 빈자리를 보니 마음이 착잡했다. 그냥 그대로 놓아두어도 전혀 동네 미관을 해치거나 거치적거리지 않을 텐데도 왜 저렇게 재빠르게 옛것들을 없애버리는지…. 마치 그 빈자리가 세상의 벽에 뚫린 상처 입은 구멍처럼 씁쓸하고 잔인해 보였다. 그래도 빨간 우체통 앞을 지날 때면 편지, 우체부, 그리움 같은 단어들이 생각나고, 고(故) 신현정 시인의 ‘빨간 우체통 앞에서’란 시도 떠올라 괜히 하늘도 한번 올려다보고, 날아가는 새들도 바라보고, “그대여 나의 그대여” 옛사랑을 읊조려 보기도 해 참 좋았는데….

처음 이 동네로 이사 왔을 때도 곳곳에 아직도 남아 있는 옛 모습들, 오래되고 낡았지만 그만큼 더 다정해 보이는 옛 방앗간이나 이발소, 사진관 등이 있어 동네 한 바퀴를 돌 때마다 기웃기웃, 두근두근, 콩닥콩닥,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지금은 그 흔적들조차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대신 하루가 멀다고 모든 게 하나둘 새것으로 바뀌고, 세련된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 오히려 개성 없는, 획일적인 동네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구식 아날로그 세대라 그런지 이렇게 빠르게, 똑같이 변하는 것들이 무섭고 두렵다.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신개발’이란 단어는 더욱더.

괜히 마음이 속상하고 울적해져 비틀스의 ‘Please Mr. Postman’을 나직이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와 벽에 붙여놓은 ‘우체부 조셉 룰랭의 초상’을 바라본다. 빈센트 반 고흐가 아를에서 그린 그림. 왠지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내가 한없이 너그럽고 선량해지는 기분이 들어 이사할 때마다 벽에다 붙여놓게 된다. 조셉 룰랭은 아를에서 친구 하나 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는 고흐를 가족처럼 따뜻하게 품어준 사람이다. 배고픈 고흐를 집으로 초대해 함께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스스럼없이 술친구가 되어준 사람. 모델료가 없어 모델을 쓰지 못하는 고흐에게 자신의 가족을 모델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준, 고흐에겐 유일무이한 이웃이자 진정한 친구였던 사람. 고흐가 고갱과의 불화 끝에 왼쪽 귀를 잘랐을 때도 한 치의 편견 없이 고흐의 편에 서서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을 수 있게 끝까지 돌보아주었던 사람이다. 나는 이 룰랭 가족만 생각하면 아, 그래도 죽기 전 잠깐이라도 고흐 곁에 이런 따뜻하고 선한 가족이 있었다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지 모른다. 이들은 뼛속에서 뼛속으로 연두색 봄이 흐르는 사람들이다. 이들과 끝없이 이어져 나도, 내 인생에도 빨간 우체통을 품고 사는 고흐와 룰랭 같은 아름다운 친구가 몇 명 있었으면, 나도 모르게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김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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