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경영가·행정가로 40여년 외길
무대세트·의상·소품 등 자체생산 가능
국립극장, 대한민국 유일한 제작극장
‘교향악축제’와 같은 대표 축제 구상
관객 접근성 높이고 공연 확대할 것
박인건(67) 국립중앙극장 극장장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뻔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연히 잡은 바이올린에 푹 빠졌고, 경희대 음대(1983년 졸업)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당시 대학 스승이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김남윤(1949∼2023) 교수였다. 김 교수는 제자에게 “음악 하는 사람이 클래식 공연 기획 매니저 일도 해보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하곤 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해외에서 공부한 음악가들의 귀국 독주회나 음대 교수들의 발표 연주회가 많았다. 하지만 클래식을 포함해 공연 예술 분야는 전문 기획사가 드물었기 때문에 연주자들이 직접 뛰어다니며 연주회 자리를 마련하고, 주변에 무료 초대권을 나눠주며 꼭 와달라고 읍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원에서 음악공부를 이어가던 박 극장장은 결국 연세대와 한양대 음대 대학원 친구 두 명과 1985년 조그만 공연기획사를 차려 대표를 맡았다. 그렇게 클래식뿐 아니라 판소리, 무용 등 공연 기획 일을 하다 지방대 강사로 있던 그를 예술의전당에서 급히 찾았다. 1987년 10월이었다. 이듬해 음악당 개관 음악회를 앞두고 담당자가 갑자기 관두면서 사람이 필요했다. 박 극장장은 개관 음악회 준비 관련 권한을 다 주는 조건으로 승낙한 뒤 특채로 예술의전당에서 일하게 됐다. 그는 예산 3억원을 받아 짠 30개 프로그램으로 한 달간 이어진 개관 음악회를 무사히 마무리 지었다. 당시 3억원은 큰돈이었다. 파블로 카살스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중 한 명인 러시아 출신 거장 로스트로포비치 국내 초청료가 3000만원가량 할 때였으니.
능력을 인정받은 박 극장장은 이후 예술의전당 공연기획부장과 세종문화회관 공연기획부장에 이어 충무아트센터, 경기아트센터,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KBS교향악단, 부산문화회관, 대구오페라하우스 책임자를 두루 거치며 2023년 3월 국립극장장 자리까지 올랐다. 40년 가까이 공연예술 현장에서 호흡하며 예술 경영자·행정가의 길을 걸어온 박 극장장을 지난 6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만났다.
―예술의전당을 대표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인 ‘교향악축제’도 직접 만들었다고.
“공연기획팀장이던 1989년 음악당 개관 1주년 기념으로 뭘 할까 고민하다 교향악축제를 만들었다. 전국에 교향악단이 10여개밖에 없을 때인데 일일이 찾아다니며 축제 참가를 독려했다. 지휘자 임헌정(71) 씨가 ‘부천도 시립교향악단 만드는데 내년에 나가겠다’고 해서 ‘형님, 내년이 어디 있습니까. 금년에 나오세요’라고 독촉했다. 부천시향 단원들이 합숙하며 연습한 뒤 그해 참가했는데 히트를 쳤다.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가 아직까지 잘 이어지고 지금은 국내 교향악단이 40여개나 돼 뿌듯하게 생각한다.” 박 극장장은 한국무용을 기반으로 전국 국공립 무용단이 참여하는 마당 등 국립극장에서도 ‘교향악축제’처럼 대표 브랜드로 자리 잡을 축제를 구상 중이다.
―1999년 세종문화회관으로 왜 옮긴 건가.
“공연기획부장일 때인데, 1997년 재단법인화한 세종문화회관의 이종덕 사장(1935∼2020·전 예술의전당 사장)이 ‘야, 만 원 더 줄 테니 세종문화회관으로 와라’고 해서 예술의전당 급여보다 1만 원 더 받는 조건으로 가 공연기획부장을 맡았다. 그런데 오히려 50만원이 줄자 이종덕 사장이 미안했는지 부사장으로 해주더라.(웃음) 개인적으로 13년 일한 예술의전당이 ‘본가(친정)’, 6년 일한 세종문화회관이 ‘시집’이라고 생각한다.”
―곧 취임 1주년을 맞는데 돌아보면 어떤가.
“그전까지 극장장 자리가 1년 반이나 비어 있다 보니 직원들도 매너리즘(타성)에 젖어 있고 처음엔 어디서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나의 철학은, 공연장 업종이 서비스업인 만큼 우리 무대에 서는 예술가와 공연장을 빌리는 사람(대관자),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에게 최대한 좋은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극장 안팎을 깨끗하게 손질했다. 또 (3호선) 지하철 동대입구역에서 내릴 때 열차 안내 멘트에 국립극장이 안 나오는 걸 알고, 광고 비용을 지불한 뒤 나오도록 했다. 해오름극장(대극장)에 쾌적한 북카페를 열고, 식당도 입점시킨 것처럼 관객 편의성을 높여나갈 것이다. 사실 (국립극장장으로서) 나의 사명은 3개 산하 예술단체의 기량과 3개 극장 공간을 활성화하는 것이라 여기에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국립극장은 1950년 4월 서울 태평로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의사당)에서 창설됐고 6·25 전쟁 발발 후 1953년 대구 문화극장, 1957년 서울 명동 시공관(현 명동예술극장)으로 옮겼다가 1973년 장충동 남산 자락에 터를 잡았다. 당초 7개 전속 예술단체 중 국립 오페라단·발레단·합창단이 2000년 2월에, 국립극단이 2010년 4월에 각각 재단법인화하면서 전통 예술 쪽인 국립 창극단·무용단·국악관현악단 3개 단체만 남았다. 해오름극장(1221석)과 달오름극장(512석)·하늘극장(627석) 3개 공연장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국립극장의 정체성은 전통을 기반으로 한 제작극장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극장들 공연 횟수가 너무 적었다. 1년에 100회 정도더라. 그래서 내 임기(3년) 동안 연 200회까지 늘리는 것으로 목표를 세우고 단원들을 설득해 횟수를 늘리고 있다. 각 단장과 예술감독에게도 단원들의 동료나 선배 역할이 아니라 리더 역할을 제대로 하도록 권한과 책임을 부여했다. (국립극장 환경과 예술단체 체질을 바꾸느라) 직원들이 피곤했을 텐데도 잘 따라와 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성과라는 게 그렇다. 나는 여기를 자주 찾는 사람들이 ‘어? 국립극장이 조금 바뀌었네, 서비스도 좋아졌네’ 하는 소리를 가장 듣고 싶다. 국립극장의 변화가 좋은 반응을 얻게 되면 직원들도 더 신이 나서 일하고 공연(작품)을 만들지 않겠는가.”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보다 공연 횟수도, 공연장 좌석도 적다. 국립극장만의 강점이 있는가.
“진정한 제작극장은 자체 극장과 산하 예술단체가 있고, 무대 장치와 세트, 의상, 소품 등 공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별도 제작소에 무대 담당 직원만 70명이나 될 만큼 제대로 된 제작극장 형태를 갖춘 곳은 국립극장이 국내에서 유일하다. 다른 제작극장은 대부분 무대 세트와 소품 제작을 외부에 맡기는데 국립극장에선 직접 도면을 가지고 무대를 만든다. 예를 들어 연출이 ‘지팡이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면 뚝딱 만들어주고, ‘그거 좀 짧은데’ 그러면 바로 알맞게 잘라 준다. 이런 극장은 대한민국에 국립극장밖에 없다. 또 수익성을 크게 신경 써야 하는 다른 극장과 달리 국립극장은 돈(예산)만 잘 쓰면 되기 때문에 장애인을 위한 공연 등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지만 꼭 해야 하는 좋은 작품도 만들 수 있다.”
―장애인을 위한 공연은 어떻게.
“아마 국립극장이 제일 잘할 것이다. 1년 공연 예산 90억원 중 10억원을 이른바 ‘무장애 공연’에 쓴다. 장애인 공연에는 수어 통역사를 비롯해 보조 인력이 많이 투입된다. 장애인 배우와 관객들이 최대한 불편 없이 공연에 참여하고 관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제작 기간도 길어지니 비용이 많이 들어 제작 편수가 적은 게 안타깝다. 장애인 공연을 만드는 기획자 등 전문 인력과 시스템을 국립극장에 갖출 수 있도록 정부가 예산을 좀 더 지원해주면 좋겠다.”
―국립극장의 아쉬운 점이라면.
“가장 아쉬운 건 대극장(해오름극장) 좌석이 원래 1550석에서 (4년간 새 단장을 거쳐 2021년 재개관한 뒤) 1200석으로 바뀐 거다. 음향 등 시설은 좋아졌지만 300석이 날아가면서 대관에 어려움이 있다. 좋은 공연을 하려면 그만큼 많은 제작비가 투입돼야 한다. 2000∼3000석은 돼야 이틀 공연을 하더라도 제작비를 뽑아내는데 1200석은 이틀 매진시켜봐야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의 1회 공연밖에 안 된다. 그러니까 좋은 상업적 공연의 대관 신청이 별로 없다. 그래도 지난해 자체 기획공연 좌석 점유율이 85%를 넘어 (마케팅용 초대권을 빼면) 사실상 거의 매진사례를 기록했다. 창극단은 물론 무용단과 국악관현악단 작품도 그렇다. 우리 전통예술을 사랑하고 아끼는 관객층을 보이지 않게 확보하고 있는 국립극장이 어떻게 보면 자랑스럽더라. 올해는 기획공연 좌석 점유율을 90%로 높일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K컬처(한국 문화) 열풍이 거세다. K컬처 위상을 실감하는가.
“그렇다. K팝뿐 아니라 한국의 기초예술 위상도 몰라보게 높아졌다. 2000년쯤인가 세종문화회관 시절 이탈리아 베로나 극장에 가서 오페라 내한 공연을 요청했는데, 극장 측이 ‘우리 비싼데 너희 진짜 우리 부를(초청할) 수 있어?’ 이런 식으로 시큰둥해서 되게 기분이 나빴다. 나중에 대구오페라하우스 대표 시절 다시 베로나 극장을 찾아가니 사장이 달려 나오면서 반갑게 인사하는 걸 보고 한국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실감했다. 해외 유수 오페라단들은 이제 한국 성악가가 없으면 제대로 공연하기 어려울 정도다. 지난해 국립창극단이 ‘트로이의 여인들’을 들고 영국 에든버러 축제에 갔을 때 큰 호평을 받았다. 현지 할머니 관객들이 감동받아 막 울기도 했다. 이에 영국 바비칸센터가 굉장히 좋은 조건으로 오는 9월 창극단을 초청했다.”
―이런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 우선 중요한 건 뭐라고 보나.
“연극, 무용, 국악, 클래식 등 기초예술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방탄소년단(BTS)도 나오고 K팝이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많은 예술단체가 정부와 민간의 지원 없이는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 게 어렵다. 그래서 자꾸 상업적인 데로 가다 보면 기초예술이 무너진다. 정말 의미 있는 작품보다 돈 되는 것만 하려 한다. 기초예술 지원 예산 확충과 기업 등 민간의 예술 지원 활성화를 위해 세제 혜택 같은 대책이 시급하다.”
◆박인건(67) 극장장은…
●1957년생 ●경희대 음악대학 기악(바이올린 학사) ●경희대 대학원 음악교육학 ●예술의전당 공연기획부장 ●세종문화회관 공연기획부장 ●충무아트센터 사장 ●경기아트센터 사장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관장 ●KBS교향악단 사장 ●부산문화회관 대표 ●대구오페라하우스 대표 ●국립중앙극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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