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순의 구성으로 작가 신념 반영
광범위한 기록과 건축물 바탕으로
업적부터 치부까지 집요하게 접근
킴벨 미술관 등 대표 작품 직접 답사
완성 과정 속 예술적 사유 담아내
생애·업적 평면적으로 기술 안해
일반적 평전 구성과 차별화 눈길
루이스 칸 : 벽돌에 말을 걸다/ 웬디 레서/ 김마림 옮김/ 사람의집/ 3만원
문명이 있는 곳에 건축이 있다. 건축은 곧 삶이다. 건축은 ‘스스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다른 예술 작품과는 달리, 개방적이고 능동적이며 일상적이다. 재료와 공간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했던 건축가 루이스 칸은 1974년 펜실베이니아 기차역(펜역)에서 죽음을 맞았다. 공공건축에 힘을 쏟았던 그의 삶을 돌아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저자는 칸의 ‘삶’과 ‘건축’ 모두를 통찰한다. 일반적인 평전의 구성과 다른 방식을 취한다. 생애와 업적을 평면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그의 ‘죽음’에서 출발해, 1901년 출생과 그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안겼던 사건을 평전의 마지막 장에 배치했다. 이러한 역순의 구성, 회귀적 방식은 ‘존재의 시작’과 ‘근원’을 강조했던 칸의 생각과 신념을 반영한 것이다. 칸이 언급했듯 위대한 건축물을 마주할 때 상기하게 되는 시간성,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살려내고 있다. 사물의 기원, 존재의 본질로 돌아가고자 했던 루이스 칸의 신념이 투영된 셈이다.
책은 두 가지 흐름으로 전개된다. 방대한 양의 인터뷰, 서간, 일기와 메모, 강연 그리고 노트와 연구 문헌 등을 집대성하고 정리해 루이스 칸의 삶과 업적을 기술한 내용이 하나의 주요한 흐름이라면, 칸의 대표 작품 ‘소크 생물학 연구소’, ‘킴벨 미술관’, ‘필립스 엑서터 도서관’,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인도 경영 연구소’를 직접 답사하고 그 내용을 담은 에세이 ‘현장에서’가 또 다른 흐름이다.
펜역의 죽음에 이어 에스토니아에서의 유년 시절, 미국으로의 입항, 세계적인 건축가로 주목받고 도약하기까지 저자는 칸의 궤적을 따라 광범위한 기록과 남겨진 모든 자료를 통해 칸을 복원한다. 칸의 천재적인 재능과 업적 그리고 비밀스러운 관계와 치부까지도. 칸의 ‘빛’과 ‘그림자’ 양면 모두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유년기부터 칸은 음악과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수줍음이 많았지만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몰아붙이는, 과단한 면이 있었다. 건축을 발견한 뒤로 건축은 곧 예술적 열망의 대상이자 그의 모든 것이 된다. 자신의 건축 회사를 설립하고 다양한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경제적 이윤 추구는 그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때문에 그의 회사는 늘 적자였고 때로는 급여를 지급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다.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와 직원들이 증언했듯이 칸은 ‘수완 좋은 건축가’가 아니었고 ‘예술의 본질을 추구했던 건축가’였다.
칸은 아내 에스더와 딸 수앤을 두었지만 그 외에 숨겨진 관계로 해리엇, 마리 궈, 앤 팅이라는 세 명의 여성과 슬하에 너새니얼, 알렉스라는 두 자녀가 있었다. 저자는 칸의 사적 관계를 덮으려 하지 않는다. 평전은 칸과 얽힌 복잡다단한 관계 속에서 ‘정부’와 ‘혼외자’라는 이름으로 겪어야 했을 이들의 아픔과 고통, 아버지 칸에 대한 그리움 등을 가감 없이 적시한다.
칸은 반세기 동안 235개의 건물을 설계했고 이 가운데 81개가 실행됐다. 1952년 이후 완성된 그의 40여개 작품 가운데 우리가 주로 손꼽는 것은 ‘소크 생물학 연구소’, ‘필립스 엑서터 도서관’, ‘킴벨 미술관’,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인도 경영 연구소’, ‘트렌턴 배스 하우스’, ‘루스벨트 포 프리덤스 공원’ 등이다.
책은 그의 대표적 건축물이 어떻게 계획되고 훗날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칸의 건축 철학과 예술적 사유 등을 곳곳에 적고 있다.
‘결국 킴벨에서 가장 특별한 것은 빛 자체만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곳으로 빛이 들어와 그 빛에 의해 그 방의 윤곽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 그것은 시각적인 것이 촉각적인 것이 되는, 빛 자체를 촉각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예술의 본질에 도달하는 것이다.’(170쪽)
‘킴벨 미술관’의 고측창에 드리워진 빛과 은빛 표면의 역할, 소크 프로젝트에서 폴디드-플레이트 설계안을 위해 1년 넘게 시간을 쏟고 결국 설계를 바꿔야 했던 일, 콘크리트가 완벽한 재료라는 사실을 깨닫고 콘크리트라는 재료에 더 깊이 빠지게 된 계기, ‘필립스 엑서터 도서관’에서 구조를 통해 받게 되는 영감, ‘예일 대학교 아트 갤러리’의 기하학적 천장을 설계하게 되는 과정 그리고 루이스 칸의 화상 흉터로 풀어내는 잭 매칼리스터의 흥미로운 인터뷰 등이 맛을 낸다.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의 모스크가 착안되는 극적인 순간도 인상적으로 서술한다.
저자가 칸의 삶을 돌아보고, 그가 이룬 건축을 통해 찾아내려 했던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건축, 본질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창조성과 그 ‘믿음’이다. 건축은 우리를 찾아온다. 계단을 오를 때 그 움직임을 통해 새로운 빛과 형태, 질감을 마주하고 발견하는 것처럼. 건축가이자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았던 루이스 칸. 그를 읽고 나면 우리 주변의 공간이 새롭게 말을 걸어올 법하다.
“계단이 넓은 이유는, 올라가는 데 여유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이 계단을 오르는 일 자체가 이 건물에서 경험하는 사건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며 … 당신은 계단을 마음속으로 중요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또 계단을 오르면서 당신이 환영받고 있음을 느끼는 겁니다.”(루이스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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