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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누리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흰 발목 양말이

흘러내려요 걷다 멈춰 서고, 다시

그걸 반복해요 왼쪽이 그러면 오른쪽이 그러는 것처럼

나란히 무너지고 있거든요 내일이 그러나

 

이미 사랑하고 있답니다 사랑을

나에게 스스로 말할 용기는 없지만,

 

걸어가도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 거예요

어차피 나는 천천히

타들어갈 텐데요 빛이 빛을 부수는 것처럼.

 

미안해하는 나를 상상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니?

 

물으면 나는 잘 모르겠고요

하지만 사랑에는 제법 재능이 있습니다

참 부러운 재능이다. 사랑이라는 재능 말이다. 그런 재능을 갖고 있노라 선언하는 일 또한 귀한 재능 아닐까.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계속 흘러내리는 양말처럼 세상의 크고 작은 것들이 죄다 무너지고 있다고, 내일 또한 다르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이미 사랑하고 있답니다” 말하는 용기. 천진을 가장한 맹기.

이 시를 읽다 보면 끝내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야말로 광포한 지금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무기라는 생각이 든다. 당장은 ‘나’를 확신할 수 없다 해도, “어차피 나는 천천히 타들어갈” 거라 체념할 수밖에 없다 해도,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니?” 묻고 또 묻는 것.

다소 막연한 이야기처럼 느껴지려나. 하지만 떠올려보면 늘 그랬던 것 같다. 현실이 너무 냉혹할 때는 그저 믿기로 했던 것 같다. 맹목의 믿음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방도가 없을 때. 오직 그 하나밖에 없을 때. 이 시가 말하는 사랑은 꼭 그런 믿음을 닮았다. 흡사 사랑이라는 신앙.


박소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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