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1000여명 희생의 역사도 있다
‘한팔 없는 용사’ 웨버 대령도 회고
한미 안보동맹→경제동맹 전환해야
“카투사로 군에 복무한 게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습니다. 선배들의 희생으로 오늘 우리가 있다는 걸 새삼 느끼는 그런 자리였죠.”
김종욱(69·스위스포트코리아 회장) 대한민국카투사연합회 명예회장은 8년 전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6·25전쟁 추모 행사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벅차 오른다. 6·25전쟁 당시 미군에 배속돼 북한군과 싸우다 전사한 카투사(KATUSA) 선배들 7052명의 이름이 일일이 불려진 역사적 순간이었다.
2016년 6월25일 한국과 미국 관계자 100여 명이 카투사 전사자 이름을 한국어와 영어로 한명씩 번갈아 불렀다. 롤콜(roll call) 행사에 첫날 오후와 이튿날 해서 약 12시간이 걸렸다. 김 명예회장과 6·25전쟁 참전용사 윌리엄 웨버 예비역 대령의 노력이 연출한 장면이다. 6·25전쟁 때 오른팔과 오른쪽 다리를 잃은 웨버 대령은 휠체어에 앉아 왼팔로 거수경례하는 사진으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한평생을 6·25전쟁 재조명과 한미관계 발전을 위해 힘쓴 그는 2022년 4월 97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카투사는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이승만 대통령과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구두 합의로 한국군이 미군에 배속되는 방식으로 전쟁에 참여하면서 만들어졌다. 카투사 4만3000여명이 참전해 1만1000여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미군 전사자 3만6634명과 카투사 전사자 7174명의 이름은 2022년 7월 워싱턴 워싱턴DC 한국전참전용사기념공원에 건립된 ‘추모의 벽’에도 새겨져 있다.
김 명예회장은 카투사 경험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자랑스러워한다. 부산 경남상고를 졸업한 그는 1977년 입대해 1979년까지 2년6개월 카투사로서 동두천 미2사단 전산실에서 근무했다. 카투사를 특별한 기준 없이 무작위로 뽑던 시절이었다.
2011년 11월 김 명예회장이 대한민국카투사전우회 회장을 맡아 엄청난 열정과 추진력을 보이면서 카투사 모임이 활발해졌다. 인터넷 카페모임에 그쳤던 단체를 외교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등록했다. 이름을 대한민국카투사연합회로 바고 회원 지위향상 뿐 아니라 카투사와 주한미군 출신 간 교류 협력 등을 위해 애썼다.
주한미군과 한미연합사령부에서 근무한 미군 장병 350만명을 아우르는 주한미군전우회(KDVA·Korea Defense Veterans Association)가 발족하는 데에도 그의 땀방울이 배어 있다. 웨버 대령과 같은 참전미군용사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상황에서 2017년 만들어진 KDVA는 한미동맹을 상징하는 핵심 플랫폼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 미군들과 함께 한 카투사 출신들 활약이 기대될 수밖에 없다.
6·25전쟁 74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서울 강서구 가양동 ㈜A.C.E Express 사무실에서 김 명예회장을 만났다.
―8년전 워싱턴에서의 6·25전쟁 전사자 추모 행사를 잊지 못할 것 같은데.
“2015년 웨버 대령한테서 연락이 왔었다. 호명 행사를 하려고 하는데 카투사 전사자 명단을 달라고 하더라. 국방부에 알아보니까 명단이 구분이 안 되어 있었다. 국방부는 육군으로만 관리했지 카투사를 별도로 구분하지 않았다. 1982년 시험으로 카투사를 뽑을 때부터 별도로 구분해서 관리했다고 한다. 처음에 찾은 명단이 3천 몇백 명밖에 안됐다. 분명히 6·25전쟁에서 전사한 카투사가 8천 몇백명이고, 실종자가 3천 몇백 명 해서 총 1만1000여명인데 말예요.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6개월 동안 찾은 명단이 7052명이었다. 이 명단을 갖고 워싱턴에 갔죠. 2016년 6월25일부터 사흘에 걸친 행사에서 이름을 다 불렀어요. 한 전사사 이름을 우리 측이 한국어로, 미국측이 영어로. 첫날 오후와 다음날이니 12시간이 넘게 걸렸다. 마지막 날 오전에는 폐막식을 했다. 웨버 대령과 내내 같이 지켜봤다.”
―6·25전쟁에서 카투사의 희생을 모르는 국민이 많은 게 사실이다.
“웨버 대령이 생전에 자신이 전장에서 겪은 얘기를 생생하게 얘기해 줬다. 팔과 다리를 어떻게 잃었는지, 카투사들이 자기 옆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상세하게 설명해 주더라. 전쟁 과정에서 카투사들이 미군에 중요했던 건 지리와 언어도 있지만 무엇보다 피아식별 때문이었다. 미군으로서는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누가 중공군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카투사들이 지리에도 밝고 피아식별을 해야 하기 때문에 부대 맨 앞에 설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희생이 컸다. 6·25전쟁에 카투사로 4만3000 몇 백명이 참전했는데 거의 25%, 4분의 1이 희생됐다.”
―카투사와 미군의 연대의식이 강할 수밖에 없겠다.
“카투사는 세계 어느 국가에도 없고 우리나라에만 있다. 미군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싸웠죠. 그런데 그들은 우리처럼 혈맹관계가 아니. 우리는 6·25전쟁부터 함께 싸운 그런 혈맹이다. 주일미군에도 카투사 같은 조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카투사는 한국과 미국을 연결하는 소중한 자산이다.”
―생존해 계신 카투사 참전용사는 몇분이나 되는지.
“우리가 12분까지 파악했는데 벌써 예닐곱 분은 돌아가셨다.”
―미국에서도 참전 용사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을 것 같은데.
“KDVA가 만들어진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그것이다. 미국에도 한국전참전용사회(KWVA·Korean War Veterans Association), 한국전참전용사추모재단(KWVMF·Korean War Veterans Memorial Foundation)이 있지만 회원 대부분이 80대 중반이라서 계속 유지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KDVA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할 것 같다.
“미국인들은 참전용사를 자랑스러워하고 그 분들의 희생과 정신을 기린다. 아버지, 할아버지가 어디에서 근무했는지 가족들 관심이 크고 자부심도 강하다. 6·25전쟁 미국 참전용사가 190만명, 전후에 한국을 경험한 주한미군이 약 350만명이 된다. 참전용사 자녀와 손자들까지 하면 가족이 10명 정도라고 보면 5000만명 넘는 어마어마한 숫자다. 한미 우호협력의 소중한 자산이다. 평소 이 분들과 교류를 강화해 나가야 한다. 이제 한미간에 안보동맹을 넘어 경제동맹으로 발전해 가야 한다는 게 소신이다.”
―경제동맹이라는 개념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데.
“5000만명 넘는 소중한 이들을 우리가 좀 더 지원하고 서로 상생하는 방안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요즘 우리 기업들이 미국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좋은 인력을 구하는 게 중요하다. 미군들은 직업군인이다 보니 5년마다 재계약한다. 텍사스의 조인트 베이스 포트 샘 휴스톤에서만 해도 매달 300∼400명이 전역을 한다. 그 친구들은 최고의 인력이다. 우리 기업들과 제대 미군들을 연결하면 윈윈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박희준의 인물화(話)④-2 김종욱 카투사연합회 명예회장’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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