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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초등학교 2, 3학년들 사이에 이성 친구를 사귀는 일이 유행이란다. 거기에 ‘사귄다’는 단어씩이나 가져다 붙이는 것이 온당한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누군가 먼저 마음을 고백하고 상대가 받아주면서 특별한 관계가 시작된다니 저희 딴에는 제법 그럴듯한 절차도 있는 모양이었다.

또래 여자아이들에 비해 생각이나 언행이 늦된 딸아이 눈에도 그것이 신기해 보였을까. 얼마 전부터 녀석은 집에 오기 무섭게 누가 누구랑 사귄다느니 누가 누구에게 차였다느니 종알종알 떠들어댔다.

그런데 문득 특정 남자아이 이름이 반복 등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편의상 J라고 하자. 정보를 종합하면 J는 한 여자아이에게 고백을 받았다. 얼마 후 다른 여자아이에게도 연애편지를 받았다. 그러고 다시 며칠 후 또 다른 여자아이에게 초콜릿을 받았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고작 만 8세 초등학생이 대체 어떤 마성을 가졌기에 며칠 단위로 줄줄이 고백을 받는단 말인가. 그러게. 딸아이가 맞장구를 쳤다. J가 왜 인기가 많은지 모르겠다고 했다. 녀석도 그를 좋아한다면 어쩐지 실망스러울 것 같던 차에 나는 다행이다 싶었다.

그리고 어제, 하굣길 딸아이와 함께 동네 놀이터를 지날 때였다. 놀고 있던 친구들을 알아본 아이가 냅다 그들에게 뛰어가더니 함께 놀기 시작했다. 하필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싫어, 안 가, 나도 더 놀 거야. 떼쓰는 녀석 때문에 난처해진 나를 보고 한 여자아이가 나섰다. 우리도 곧 집에 갈 거야. 그러니까 너도 엄마 말씀 들어. 딸아이와 동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의젓하고 성숙한 아이였다. 덕분에 판세가 나에게 기울면서 딸아이는 울상이 되었다. 잠깐만요. 한 남자아이가 앞으로 나선 것은 그때였다. 딸아이를 한번 보고 다시 나를 쳐다보며 그는 물었다. 조금만 더 놀다 가게 해주시면 안 돼요?

그가 바로 J였다. 어떤 허락보다도 강력한 그의 질문 하나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딸아이는 신나서 다시 친구들 쪽으로 뛰어갔다. J는 웃으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엉겁결에 따라 웃으며 나는 생각했다. 얘가 왜 인기가 많은지 모르겠다니, 딸아이는 어떻게 그걸 모를까.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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