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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사건 후 처음 마주앉은 남북… 면전서 삐라 던지고 고성·욕설 난무

입력 : 2024-07-02 18:48:55 수정 : 2024-07-02 18:4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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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 남북회담문서 5번째 공개

北 “이게 뭡니까” 南전단 흔들자
南 “우리도 새벽에 많아요” 맞서

“이게 뭡니까(삐라를 들고 남측대표단 앞에 흔들어 대며) 이거 오늘 새벽 4시에”(북) “우리도 새벽에 그런 것이 많아요.”(남)

“버마 암살 폭발 만행이 북한 당에 의해서 자행된 사실이란 것은….”(남) “단장선생 이거 회담을 하자는 겁니까 그만두자는 겁니까”(북)

 

1984년 4월 3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제2차 남북 체육회담 모습. 통일부 제공

1983년 10월 아웅산 테러 사건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 마주 앉은 회담장은 사과를 이끌어내려는 한국 대표단과 정치언급을 꺼내지 못하게 하려는 북측의 기싸움으로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통일부는 1981년 1월부터 1987년 5월까지 인도주의 협력과 체육분야 남북회담문서 1693쪽을 2일 일반에 공개했다. 2022~2023년 총 네 차례에 이어 이번이 다섯 번째 남북회담문서 공개다.

사료에는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 발표(1982.1) △전두환 대통령 암살을 기도한 버마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1983.10) 및 북한의 3자회담 제의(1984.1) △남북한 체육회담(1984.4~5) △남북한 수재물자 인도·인수(1984.9~10) △제8~10차 남북적십자회담(1985.5∼12)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1985.9) 진행 과정과 회의록이 포함됐다.

북측은 1980년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대표 접촉이 성과 없이 끝난 후 남측의 대화 제의를 줄곧 거부하다가 1983년 아웅산 폭탄 테러 3개월 후 북·미와 한국이 참여하는 3자 회담을 들고나왔다. 이어 이듬해 두 달밖에 남지 않은 LA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논의하자고 돌연 제의했다.

1984년 4월 어렵게 복원된 회담에서 의제 논의는 뒷전에 밀린 채 아웅산 폭발 테러와 영화인 신상옥·최은희 납치사건을 두고 고성과 욕설이 오갔다. 아웅산 테러 시인·사과부터 하라는 남측에 북측은 아웅산 테러가 남측의 “자작극에 불과하다”고 적반하장으로 맞섰다.

당국 간 ‘삐라’(대북 전단)로 인한 갈등도 회담장에서 표출됐다. 북측 대표는 “이게 뭐야, 이게! 이거 보라!”라고 외치며, 챙겨온 전단을 한국 측 대표를 향해 냅다 던졌고, 우리 측 대표는 지지 않고 “누구한테 무례한 짓을 하고 있어!”라며 전단을 되던졌다. 더 나아가 “귀측의 부자세습왕조 구축과 우상화는 자유세계는 물론 심지어 공산권 내부에서까지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고 직격하자 북측은 “귀측에서 도발을 너무 하고 있어요”라며 고성을 질렀다.

세 차례 회담 내내 팽팽한 대치만 이어진 남북 체육회담은 북한이 다른 공산권국가의 LA올림픽 보이콧 결정에 합류하면서 아무런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

이외에도 회담사료에는 이산가족 상봉 협상 중에 이산가족 당사자를 한 명이라도 상봉시키려는 우리 쪽과, 화해분위기를 위해 이산가족 상봉 인원을 축소하고 대신 예술단을 내려보내 전국을 돌게 하려는 북측이 맞서는 모습 등이 담겼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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