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 배추김치’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말
韓소비자 항의…넷플릭스 “‘신치’ 표기하겠다”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사옥 인근엔 유명한 우동 맛집이 있습니다. 직접 뽑은 수타면 우동과 돈가스 덮밥, 닭고기 덮밥, 튀김 덮밥 등 메뉴를 팝니다. 만일 어떤 일본인이 이 가게에 와서 “왜 일본 음식을 한국식으로 부르는 거야? 가츠동, 오야꼬동, 텐동이라고 해야지”라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저는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참 별꼴 다 보겠네. 닭고기 덮밥이라고 해야 무슨 음식인지 알 수 있잖아. 한국에서 오야꼬동이라고 하면 알아듣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스파게티, 피자 등은 현지 이름 그대로 발음해도 한국 사람 누구나 아는 음식입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닙니다. ‘이탈리아 국수’, ‘이탈리아 빈대떡’이라고 해야 “아∼ 그거?”라며 알아듣던 시절을 거쳐 자리 잡은 것입니다.
물론 익숙해진다고 다 현지식으로 부르는 것도 아니지요. 베트남 쌀국수의 경우 여전히 ‘포’(phở)라는 베트남어보다는 ‘베트남 쌀국수’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한국사람이 말하고 알아듣기에 아직은 ‘쌀국수’가 더 편하기 때문일 겁니다.
최근 넷플릭스 한국 예능 프로그램의 중국어 자막에 배추김치가 ‘라바이차이’(辣白菜)라고 번역돼 ‘오역’ 논란이 일었습니다. 많은 시청자가 이 번역이 틀렸다고 지적했고,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중국 ‘김치 공정’에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면서 넷플릭스에 시정을 요구했습니다. 한국 정부가 김치의 중국어 표기라고 정한 ‘신치’(辛奇)로 바꿔 달라는 것입니다.
넷플릭스는 2일 “한자를 사용하는 해외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라바이차이’로 표기했으나 시청자들의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해 앞으로 한국 콘텐츠의 김치를 ‘신치’(辛奇)로 표기하기로 했다”며 시정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원래 중국에서 김치를 중국 음식이라 주장하며 사용했던 단어는 ‘파오차이’(泡菜)입니다. 중국의 전통 절임 음식인 파오차이가 한국에 건너가 김치가 됐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파오차이는 피클처럼 소금물에 야채를 담갔다가 먹는 쓰촨성 고유의 음식으로, 배추를 소금 뿌려 절인 뒤 고춧가루 양념에 버무려 담그는 우리의 배추김치와는 전혀 다릅니다. 김치가 파오차이라는 일부 중국 네티즌의 주장은 그래서 틀렸습니다.
하지만 ‘라바이차이’는 좀 다릅니다. 라바이차이는 직역하면 ‘매운 배추’로 한국식 배추김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중국에서도 최근에 와서 보편화 됐습니다.
학창시절을 중국에서 보내고 현재 한중간 무역 사업을 하는 김모(42)씨는 “라바이차이는 원래 중국에 있었다기보다, 한류 영향으로 한국 문화가 알려지면서 쓰게 된 말”이라며 “이전엔 배추김치가 파오차이로 불렸으나 최근엔 ‘라바이차이’란 명칭으로 확산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중국 포털에서도 라바이차이를 검색하면 배추김치 이미지만 뜹니다. 물론 ‘동북지방 조선족의 고유 음식’이라며 중국 음식인 것처럼 정의하지만, 어찌 됐든 배추김치가 우리 한민족의 음식이라는 걸 인식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과거 김치가 파오차이로만 불리던 것을 생각하면 나름 긍정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사람들은 왜 배추김치를 라바이차이라고 부르게 됐을까요.
익숙하지 않은 외국 음식을 수용하는 나라의 언어로 표현하기 쉽게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일본 음식 오야꼬동이 한국에서 닭고기 덮밥으로 불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배추김치는 중국인에게 외국 음식, 익숙하지 않은 음식이고, 라바이차이는 중국인이 들었을 때 직관적으로 배추김치를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이지요. 그래서 중국에서 배추김치를 지칭하는 말로 라바이차이가 통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김치는 한국 음식이니 한국이 정한 대로 ‘신치’라고 부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신치는 중국의 ‘김치공정’ 논란이 불거지자 문화체육관광부가 2021년 ‘김치의 중국어 표기’라고 발표한 말입니다. 영어로 ‘kimchi’인 것처럼 중국어로도 우리 이름 그대로를 쓰면 좋겠으나, 중국어 발음에 ‘김’이 없으니 최대한 김치와 비슷하게 들리는 ‘신치’로 정한 것입니다.
신치(辛奇)는 ‘맵고 신기하다’는 뜻입니다. ‘매운 배추’라는 뜻의 라바이차이와 비교하면 어떤 음식을 지칭하는 말인지 선뜻 와 닿지 않습니다. 신치라고 했을 때 배추김치를 떠올리는 중국인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이런 이유로 중국을 연구하는 한국 학자들 사이에서도 ‘신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언어는 쓰는 사람이 사용하기 편해야 합니다. 중국어로 배추김치를 표현하는 보다 적확한 단어가 라바이차이라 그렇게 쓰이는 것입니다. 넷플릭스 자막은 한국 예능을 보려는 중국사람들에게 제공되는 것이므로 그들이 알고 있는 라바이차이로 번역하면 더욱 전달이 쉽습니다. 그런데 신치가 아니라고 해서 틀렸다고, ‘오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중국 베이징대학을 졸업한 한국인 사업가 백모(27)씨는 “중국에선 배추김치를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한국 문화를 접해본 젊은이들은 배추김치를 알고 있고 ‘한국 파오차이’, 혹은 ‘라바이차이’라고 부른다”면서 “김치를 파오차이라고 하는 것은 오역이지만, 라바이차이라고 하는 것은 오역이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국내 최고 중국 문화 전문가로 꼽히는 이욱연 서강대 중국문화학과 교수는 “신치가 배추김치를 표현하기에 그리 좋은 명칭이 아니기 때문에 정부 발표 당시에도 ‘이상하다’, ‘졸속행정이다’ 등 비판이 있었다”면서 “원래 언어는 수용자가 받아들이기 쉽게 번역하는 것이다. 수용자 입장과 정서를 고려하지 않고 ‘우리가 그렇게 정했으니 다른 말은 오역이다’라고 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라고 밝혔습니다.
김치를 ‘신치’라고 알리는 일 자체를 잘못됐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수출하는 식품에 신치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콘텐츠 번역 시에도 신치를 줄기차게 사용하면 언젠가 중국에서도 ‘신치=한국 배추김치’란 인식이 자리 잡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라바이차이라는 말은 서서히 도태되고 신치만 남게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변화 역시 그들 사회 안에서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그들이 정한 그들의 언어를 우리가 틀렸다고 하는 것은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닭고기 덮밥은 틀렸고 오야꼬동만 맞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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