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이임생 기술이사 유럽 출장에서 귀국→5일 밤 홍명보 감독 만남→6일 감독직 승낙→7일 내정 발표.’
결국 홍명보 울산 HD 감독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았다. 대우도 외국인 감독 수준. 10년 전 브라질월드컵 조별리그 1무 2패 무승 탈락 이후 10년 만의 귀환이다. 새로울 것 없는 ‘고인물’ 홍 감독의 복귀에 축구팬들은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선임 과정조차 영 개운치 않다. 만남 이후 단 이틀 만에 전격 발표가 이뤄졌다. 축구협회의 ‘프로세스’ 논란이 이번 홍 감독 선임 때도 불거지는 모양새다.
축구협회는 지난 7일 클린스만 전 감독의 후임으로 홍 감독을 내정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차기 사령탑 선임 과정을 진행했던 이임생 축구협회 기술이사는 다음 날인 8일 오전 축구회관에서 브리핑까지 진행하며 홍 감독을 선임한 배경을 설명했다.
홍 감독 선임은 속전속결이었다. 정해성 전력강화위원장 사퇴 이후 전권을 받은 이 이사는 지난 2일 유럽 출장을 떠났다. 대표팀 감독 최종 후보에 오른 3명 중 2명의 외국인 감독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면접 대상은 거스 포옛 전 그리스 대표팀 감독, 다비드 바그너 전 노리치 시티 감독. 이 이사는 4일까지 이들과 인터뷰를 마치고 5일 낮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이사는 곧바로 홍 감독이 머무는 울산으로 향했다. 그날 밤 11시 홍 감독을 만난 이 이사는 삼고초려로 설득에 나섰다. 바로 다음 날인 6일 홍 감독이 감독직을 수락했고, 7일 오후 축구협회는 홍 감독 내정 소식을 전했다. 홍 감독을 만난 지 이틀 만에 이뤄진 전격적인 감독 선임 발표였다.
이 과정에서 이 이사는 5개월간 감독 선임 과정을 이어 온 전력강화위원들에겐 ‘통보’식 연락만 했다. 그것도 정 위원장의 사퇴와 함께 전력강화위에서 물러난 4명을 제외하고 5명에게만 동의를 얻었다. 일주일 사이 3명의 최종 후보를 만난 이 이사는 결과 보고 및 피드백을 전력강화위와 함께 하지 않았고, 독단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이사는 홍 감독을 선임한 8가지 근거로는 △빌드업 등 축구협회 철학 및 게임 모델에 맞는 플레이 스타일 △원팀을 만드는 리더십 △연령별 대표팀과의 연계성 △지도자로서 성과 △촉박한 대표팀 일정 △대표팀 지도 경력 △외국 지도자의 철학을 입힐 시간적 여유 부족 △외국인 감독 국내 체류 시간 확보 리스크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실제 이 이사는 공개적으로 제대로 된 절차는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지난 5일) 홍 감독님을 뵙고 내가 (최종 감독으로) 결정한 뒤, 전력강화위 위원분들을 다시 소집해서 미팅해야 했지만, 미팅하게 되면 언론이나 외부로 (정보가) 나가는 게 두려웠다”며 “그래서 위원들에게 개별적으로 최종 결정을 해야 할지 동의를 얻었고, (최종적으로 홍 감독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어 “정몽규 회장님께 최종 후보자 리스트를 보고드렸는데, 정 회장님으로부터 ‘지금부터 모든 결정을 축구협회에서 다하라’는 답을 들었다. 그래서 김정배 부회장님께만 보고드리고 진행했다”며 “회장님이 모든 권한을 주셨기에 이번 결정은 절차대로 투명하게 나 스스로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이 이사는 최종 결정권자인 정 회장이 모든 권한을 위임했고, 자체적으로는 투명한 절차를 밟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정해성 위원장 사의 표명 이후 여전히 유효했던 전력강화위를 거치는 정식 절차 없이 개별 연락을 통해 의사 결정을 내린 사실은 변함없다. 임시 감독 체제를 두 번이나 하고, 이 과정에서 40년 만의 올림픽 본선 진출도 실패한 한국 축구는 5개월의 시간을 제대로 된 정식 사령탑을 뽑기 위해 소비했으나, 결국 이 이사 한 사람의 결정으로 홍 감독이 선임된 것이다. 이 이사는 “내 짧은 지식과 경험을 비난하셔도 좋다. 하지만 스스로 이 결정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홍 감독도 비난을 피하긴 어려워 보인다. 그간 축구협회를 향해 비판을 이어온 홍 감독은 감독직 고사 의사도 밝혀 왔지만 이 이사 만남 이후 대뜸 마음을 뒤바꿨다. 리그 3연패에 도전하던 울산 HD 선수들과 팬들은 시즌 중 감독을 잃으면서 당혹스러울 뿐이다. 홍 감독은 별다른 입장 표명 없이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채 ‘잠수’를 탔다. 팬들에게 사과의 말을 미루고 있는 형국이다.
최종 결정 과정에서 절차적 정당성이 부족한 경우는 한 두번이 아니었다. 앞서 정몽규 회장은 클린스만 전 감독을 선임하면서 독단적인 판단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전임) 파울루 벤투 전 감독을 선임할 때와 똑같은 프로세스로 진행했다”고 해명했지만, 클린스만 전 감독이 독일 언론을 통해 정 회장 측이 먼저 접촉했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이어졌다. 클린스만 전 감독은 카타르 도하의 한 호텔에서 정 회장을 만나 대화를 나눴고, 감독직을 제안받았다고 회상한 바 있다.
비슷한 행보의 반복이다. 헛발질 속에서 추락한 한국 축구와 축구협회가 이번 홍 감독 선임을 통해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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