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사상 최초의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으로 기록된 1964년 4월20일 민주당 김대중(DJ) 의원의 국회 본회의 연설 내용 중 일부다. 당시 야당은 여당이 자유민주당 김준연 의원 구속 동의안을 처리하려 하자 의사일정변경안을 내며 맞섰고, 제안 설명자로 나선 DJ가 장시간 연설을 이어갔다. 한·일 협정 논의 과정에서 여당이 일본으로부터 1억3000만달러를 들여와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폭로한 김준연 의원은 정부·여당의 눈엣가시였다. DJ는 김 의원 구속이 부당하다는 내용으로 의사일정변경 제안 설명을 계속했다.
필리버스터 취지에 정확히 부합하는 연설이었다.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뜻하는 필리버스터(filibuster)는 본국 승인 없이 외국에 무허가 군사원정을 나간 사람을 가리키는 스페인어 필리부스테로(Filibustero)에서 따온 말이다. 국익에 대한 방해자라는 의미가 의사진행 방해자에게 쓰이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13일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세계 각국의 필리버스터는 무제한 토론, 의사정족수 확인 요청 반복, 호명투표 요청 등을 통해 이뤄진다. 미국에선 1957년 민권법 심의 과정에서 민주당 스트롬 서몬드 상원의원이 24시간18분 동안 반대연설을 했다. 프랑스 의회에서는 2006년 8월 좌파 야당이 국영 에너지기업 ‘가즈 드 프랑스’의 민영화 법안을 저지하기 위해 13만7449건의 수정안을 제출하는 방식으로 필리버스터를 진행했다. 일본 야당은 ‘우보(牛步·소걸음) 투표’ 전술을 종종 사용한다고 한다. 1987년 예산안 심의 등에서 ‘1미터 나가는 데 1시간’이라는 지침을 세워 표결 절차를 지연시켰다.
1964년 DJ의 필리버스터를 기록한 회의록은 글자 크기 10.5로 A4용지 30쪽을 넘어간다. 그의 발언은 오후 2시37분 이효상 국회의장 발언 직후부터 오후 7시56분 본회의 산회 때까지, 장장 5시간19분간 이어졌다.
1964년 4월21일자 동아일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당시 국회법은 제46조에서 “의원의 질의, 토론, 기타 발언에 대하여는 국회의 결의가 있는 때 외에는 시간을 제한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1973년 “의원의 발언시간은 45분을 초과할 수 없다”는 규정이 새로 생기기 전까지는 사실상 필리버스터가 허용됐던 셈이다.
1969년 8월29일, 신민당 박한상 의원이 3선 개헌안 저지 목적으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에서 10시간15분 동안 반대토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1973년 국회법 개정으로 사라졌던 필리버스터는 2012년 부활했다. 몸싸움이 상징하는 ‘동물 국회’, 거대 정당의 일방적인 표결 절차를 막기 위해 여야가 국회선진화법을 도입하면서 무제한 토론 규정이 생긴 것이다.
국회법 제106조의2(무제한토론의 실시 등)
① 의원이 본회의에 부의된 안건에 대하여 이 법의 다른 규정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는 토론(이하 이 조에서 “무제한토론”이라 한다)을 하려는 경우에는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서명한 요구서를 의장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이 경우 의장은 해당 안건에 대하여 무제한토론을 실시하여야 한다.
부활한 필리버스터가 처음 활용된 때는 2016년 2월이었다. 당시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정의당, 국민의당과 함께 테러방지법 표결 처리 저지를 위해 필리버스터 카드를 썼다. 43년 만의 재등장이었다.
38명이 9일간, 192시간52분 동안 연설을 이어갔다.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헌법 전문을 읽었고, 같은 당 강기정 의원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 화제가 됐다. 마지막 발언자였던 민주당 이종걸 원내대표는 12시간31분간 발언해 최장 기록을 갈아치웠다.
2019년 11월29일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을 막기 위해, 같은해 12월27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법을 저지하기 위해 야당이던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이 사용하면서 필리버스터는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통상적인 의회 전술이 됐다.
과거에는 장시간 필리버스터를 위해 성인용 기저귀를 착용한 채 연단에 오른 이들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2019년 12월 문희상 국회의장이 생리현상 해결을 위한 3분간 화장실 이용을 허락한 이후로 연설을 중단하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토론자들이 이따금 발생했다.
2020년 국가정보원법·남북관계발전법 등 개정안 처리 저지를 위한 필리버스터에서는 국민의힘 윤희숙 의원이 12시간47분간 발언해 역대 최장 시간 기록을 갈아치웠다.
가장 최근 필리버스터는 지난 3, 4일 있었다. 국민의힘이 3일 오후 채 상병 특검법 저지를 위해 무제한 토론을 신청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당시 무제한 토론은 시간 제한이 있었다. 의석수가 192석으로 재적 5분의 3(180석)을 넘는 야권에 24시간 후에 토론을 강제 종결시킬 수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회법 제106조의2
⑤ 의원은 무제한토론을 실시하는 안건에 대하여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서명으로 무제한토론의 종결동의(終結動議)를 의장에게 제출할 수 있다.
⑥ 제5항에 따른 무제한토론의 종결동의는 동의가 제출된 때부터 24시간이 지난 후에 무기명투표로 표결하되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이 경우 무제한토론의 종결동의에 대해서는 토론을 하지 아니하고 표결한다.
야당은 필리버스터가 시작되자 종결 동의서를 제출했다. 여당의 반대 토론 중간에 찬성 토론자도 배치했다. 어차피 24시간 내에 끝낼 수 있는 만큼 특검 반대 논리를 주장하는 여당의 여론전에 맞불을 놓은 셈이었다.
다시 여야 수 싸움이 시작됐다.
여당은 발언 순서를 재조정했다. 당초 유상범(1번)·나경원(3번)·주진우(5번)·송석준(7번) 의원을 앞순번에 배치했으나, 8번이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 차례라는 게 문제였다. 이 의원이 연단에 오르면 윤석열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할 것이 자명했다.
국민의힘은 3·5·7번을 주진우·박준태·곽규택 의원 등 초선들로 재배치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이 의원의 필리버스터를 막기 위해서였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이 의원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기 위해 이 의원 이전에 토론에 나서는 의원들이 최대한 발언을 길게 하라는 원내 지도부 지침이 있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전략은 성공했다. 유상범(4시간18분)·주진우(5시간13분)·박준태(6시간49분)·곽규택(4시간40분) 의원이 장시간 토론을 이어가 이 의원 순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특히 필리버스터에서 대북송금 사건 1심 판결문을 읽어내려갔던 곽 의원은 연설을 더 이어가려고 했지만, 우원식 국회의장이 24시간이 지나 무제한 토론 강제 종결 표결을 해야 한다며 연설을 중단시켜 여당이 거세게 항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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