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손기정 기증 청동 투구’ 전시실이 있다. 1875년 독일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이 투구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코린트에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를린이 1936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뒤 독일 측은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에게 해당 투구를 부상으로 주기로 했다. 그 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1912∼2002)이 1994년 중앙박물관에 투구를 기증했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904호로 지정됐는데, 그리스 투구가 한국 문화재라니 흥미롭다.
‘기테이 손’(Kitei Son).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영문 홈페이지의 역대 마라톤 우승자 명단에 게시된 손기정의 이름이다. 기테이는 한자 ‘기정’(基禎)의 일본식 발음이다. 같은 대회에서 동메달을 딴 남승룡(1912∼2001)은 ‘쇼류 난’(Shoryu Nan)으로 기재돼 있다. 올림픽 시상대에 오른 선수들의 얼굴이 대체로 밝은 것과 달리 수상식 때 촬영된 손기정과 남승룡의 사진을 보면 둘 다 어두운 표정이다. 한국인이면서도 일본 대표로 출전한 심정이 오죽했으랴 싶다.
앞서 대한체육회는 IOC에 “손기정의 국적을 일본에서 한국으로 고쳐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IOC는 “올림픽 개최 당시의 역사를 훼손해선 안 된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이 독립국이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20세기 중반까지 일부 강대국이 아시아·아프리카 나라들을 식민지로 지배한 행위는 그 자체로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 오늘날 세계 역사학계의 공통된 인식 아니겠는가. IOC의 전향적 검토를 거듭 촉구하게 된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올림픽에 출전한 우리 국가대표 선수들 가운데 고등학교 2학년생으로 가장 어린 반효진(17)이 그제 사격 여자 공기 소총 10m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언론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당시 레슬링 선수 양정모가 한국 이름으로 첫 금메달을 수확한 이래 하계올림픽 역사상 100번째 금메달이라고 대서특필했다. 1948년 정부 수립을 기점으로 삼은 것이다. 손기정이 1936년 따낸 금메달부터 합산한다면 101번째 금메달이라는 점을 한국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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