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만들고 일본이 사랑한 고려다완
역시 그렇다. 빠질 리가 없다. 일본 도쿄 이데미츠미술관 ‘일본·동양 도자의 정화(精華)’ 전시회, 이도다완 한 점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모리 가문에 전래되던 것이라 ‘모리이도’라고도 불린단다. 이데미츠미술관은 한·중·일 3국 도자기 소장처로 유명한 곳이다.
일본의 도자기 전시회에서 이도다완으로 대표되는 고려다완은 단골손님이다. 특히 차문화와 전시회라면 빼놓을 수가 없다. 지난 4~6월 열린 ‘다도의 미학’ 전을 열어 전시품 일부로 고려다완을 소개한 미쓰이기념미술관 같은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대표 소장품 중 하나로 꼽히는 경우도 많다. 도쿄국립박물관은 소장품 12만 여 건 중 선별한 150여 건을 선별해 2020년 발간한 ‘도쿄국립박물관 지보(至寶)’라는 책에서 ‘오이도다완 우라쿠 이도’을 소개했다. 고토미술관은 소장하고 있는 ‘미노(美濃) 명(銘) 이도다완’을 “이도다완은 와비차(侘茶·일본 다도의 근본이념을 나타낸 말)의 정점으로 평가돼 왔다. 이 작품은 이도다완 중에서도 열손가락 안에 드는 명품”이라고 자랑했다. 이쯤되면 일본에서 박물관의 명성을 자부하려면 양질의 고려다완 한 점은 있어야 하는 건가 싶어진다.
고려다완은 한반도의 흙과 유약을 재료로 조선의 도공들이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깊이 애호한 것은 일본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고려다완을 향한 일본인의 시선에는 외국 문물이라며 있을 법한 약간의 이질감, 거부감도 없다. “미적평가에서는 일본의 다완”라고 할 정도다.
깊은 애정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대답을 찾다보면 일본 역사를 이끌었던 최고 권력자들의 이름이 도드라진다.
◆정치권 결속 매개체 된 이도다완
승려 묘안 에이사이가 중국에서 가져온 말차(抹茶) 풍습이 13세기 이후 확산되면서 일본 다도를 지배한 건 중국다완이었다. 건잔(建盞·중국 푸젠성 건요에서 만든 찻잔)의 인기가 특히 높았다고 한다. 무로마치시대(1336~1573)에는 아시카가 쇼군을 비롯한 지배층 사이에서 중국 물건 수집이 유행해 귄위의 상징으로 간주되기도 했는 데 다완도 수집 대상 중 하나였다.
이런 가운데 새로운 변화의 흐름이 시작됐다. 16세기 초반 교토, 나라에서 와비차가 다인(茶人)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화려하고 형식을 중시하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소박하고 정신적 면을 강조하는 와비차의 이념에는 고려다완, 그 중에서도 이도다완이 안성맞춤이었다. 와비차의 확산과 함께 중국다완은 상징적 존재로 서서히 물러나고, 고려다완의 존재감이 커졌다.
분열하던 일본 열도가 통일돼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안정된 모모야마시대(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기)에 고려다완은 중국다완을 제치고 ‘시대의 다완’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변화를 이끈 것이 고려다완을 정치에서도 활용한 당대 최고 권력자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적대 세력의 수장 시바타 가츠이에를 회유하기 위해 고려다완을 선물했다. 이런 책략이 주효해 노부나가는 시바타의 군대를 복속시킬 수 있었다. 이후에도 그는 고려다완을 포상이나 적대 세력과의 흥정에 활용했다.
노부나가에 이어 권력을 잡은 히데요시도 다르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도다완을 특히 애호해 부하들에게 내려 주기도 했다. 후지타미술관 소장 ‘노승(老僧) 이도다완’은 히데요시가 무장이자 다인으로 이름 높았던 후루다 오리베에게 선물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준 다완을 가진 다이묘는 분쟁이 발생할 경우 히데요시와의 동맹을 드러내는 증표로 활용해 상대를 압박하기도 했다. 또 정치적 결속을 다지기 위한 다회에서 이도다완을 내놓았다. 주요 기록을 보면 히데요시는 다회에서 1583년부터 1589년까지 11번 이도다완을 사용했다. 다완에 담긴 차를 나눠마시며 참석자들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확인했다.
◆고혼다완, 조선과 일본의 합작품
최고권력자의 애호는 일본 지배층 전반으로 확산됐다. 에도시대(1603∼1868) 고려다완은 명실상부 천하제일이었다. 그것을 얻으려는 경쟁도 치열했다. 뛰어난 고려다완은 성 하나와도 바꾸지 않는다, 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임진왜란 이후 쓰시마번이 조선에 설치, 운영한 가마터와 여기서 생산돼 일본으로 건너간 ‘고혼(御本)다완’은 이런 열기를 전하는 증거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조선의 수많은 도공을 포로로 잡아갔다.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도자기를 만들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핵심 재료인 흙, 땔감, 유약 등이 조선과는 달라 원하는 것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1609년 임진왜란으로 단절됐던 국교를 회복하고 1639년부터 부산, 김해, 양산에서 가마터를 만들어 다완을 비롯해 일본에서 주문한 도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한 이유다.
고혼다완 생산, 유통은 조선과 일본 교류의 창구 역할을 했던 쓰시마번이 담당했다. 쓰시마번은 다이묘, 무사, 승려 등 지배층의 주문을 받아 다완을 제작했다. 당시 주문서를 보면 크기, 무늬의 종류, 유약의 상태까지 세세하게 정해 다완 제작을 의뢰했다. 고혼다완은 일본인의 취향과 조선의 재료, 기술이 만나 탄생한 합작품이다.
다치쓰루(立鶴)다완은 고혼다완의 대표격이다. 이름 그대로 서 있는 학 무늬를 통형의 몸통에 새긴 다완이다. 학 그림은 에도막부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호소가와 산사이에게 그려준 그림을 밑바탕으로 한 것이라 더욱 유명하다. 전문 화가의 것이 아닌지라 학의 모습이 미숙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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