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늘은 주유를 보내고 공명을 세상에 보냈는가”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오나라 도독 주유는 죽음에 임박했을 때 자신보다 더 능력이 뛰어난 제갈공명을 보냈느냐며 하늘을 우러러 한탄했다. 나관중이 삼국지를 소설화할 때 각색한 부분이지만, 이는 지금도 재능이 뛰어난 2인자가 그보다 더 천재인 1인자의 존재를 탓할 때 쓰이고 있다.
지난 2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의 샹 드 마르스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유도 남자 100kg 이상급 결승에서도 주유의 한탄이 들리는 듯 했다. 한국 유도 최중량급 간판인 김민종(23·양평군청)은 4강에서 일본의 ‘난적’ 사이토 다쓰루를 상대로 시원한 업어치기로 한판승을 따내며 결승에 진출했다. 사이토는 1984 로스앤젤레스, 1988년 서울 대회에서 2연패를 달성한 ‘일본 유도의 전설’ 사이토 히토시의 아들이다.
결승 상대는 ‘프랑스 영웅’ 테디 리네르. 프랑스의 해외 속령인 과들루프 출신인 리네르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역대 최다인 11차례 우승에 2012 런던과 2016 리우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따낸 유도 최중량급 역사상 최고 선수로 꼽힌다. 결승전에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까지 리네르의 경기를 보기 위해 샹드마르스 경기장을 찾을 정도로 프랑스에서 리네르의 위상은 높다. 이날 샹 드 마르스는 리네르를 응원하기 위해 대규모의 프랑스 관중이 몰렸다. 프랑스 현지 취재진의 관심도 높아 유도 종목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하이 디멘디드’가 걸려 취재진도 추첨에 따라 티켓을 받아야만 취재가 가능할 정도였다. 리네르의 프랑스에서 얼마나 국민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지난 5월 한국 유도 최중량급 선수로서 39년 만에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을 따내며 세계랭킹 1위이자 올림픽 랭킹 1위인 김민종은 최중량급 ‘G.O.A.T’(Greatest Of All Time)를 상대로 잘 싸웠다. 신장 203cm인 리네르를 상대로 신장 184cm의 김민종은 신체적인 조건부터 불리했다. 리네르는 관록을 앞세워 정규시간 종료를 16초를 남겨두고 김민종의 오른쪽 어깨를 잡더니 기습적으로 오른다리를 걸어 김민종을 공중에 띄워 매트에 꽂아버리며 한판승으로 경기를 끝내버렸다. 김민종으로서는 너무나 아쉬운 패배였다.
경기 뒤 믹스트존에 들어선 김민종은 패배 후 흘린 눈물의 여파를 다 수습하지 못했다. 울먹거리며 그는 “너무 아쉽다. (한국 유도 최중량급의 새 역사를 썼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아쉬움만 남는 것 같아요”라고 소감을 밝혔다.
목표로 했던 금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결승 진출과 은메달만으로도 김민종은 한국 유도의 역사를 새로 썼다. 한국 유도 최중량급 선수로는 최초로 따낸 은메달이다. 그동안 역대 올림에서픽 최중량급 메달은 남자부의 경우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와 1988년 서울 대회의 조용철, 여자부는 2000년 시드니 대회의 김선영이 수확한 동메달뿐이었다.
믹스트존에 들어선 뒤 울먹거리며 아쉬움을 토로했던 김민종이지만, 생애 첫 올림픽이었던 2020 도쿄에선 16강에서 탈락한 반면 3년 뒤 열린 이번 파리 올림픽에선 은메달로 몇 걸음 더 올라섰다. 이에 대해 김민종은 “국가대표라면 당연히 성장해야 한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에는 금메달을 따지 못한 아쉬움만 너무 크다”라고 말했다. 이어 “은메달만으로 최중량급의 새 역사라고 하지만, 아직은 역사를 썼다고 하기엔 숙제가 많이 남은 것 같다. 유도를 시작하면서부터 잡은 목표가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그래서 4년 뒤 로스앤젤레스에서 금메달을 따서 그 종지부를 찍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김민종은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올림픽 메달은 하늘을 감동시키면 받는다’라는 말이 뇌리에 박혔다. 하루하루 하늘을 감동시키기 위해 열심히 하고 있다”고 금메달을 겨냥했다. 메달을 땄지만, 은빛 색깔은 김민종에겐 아쉬운 결과다. 그는 “부모님만 감동시킨 것 같다. 아직은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한 것 같다”라면서 “이번 패배가 LA로 가는 4년 동안에 큰 힘이 될 것같다. LA에서는 반드시 하늘을 감동시켜 금메달을 따겠다. 이번 올림픽에서 하늘을 감동시키는 법은 좀 배운 것 같다. 확실하게 감동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프랑스 홈팬들의 일방적인 응원도 김민종을 흔들지 못했다. 그는 “프랑스 여자 선수가 경기할 때 들려오던 프랑스 관중들의 소리를 듣고 ‘진짜 좀 크긴 크구나’라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래서 ‘이 응원 소리는 나를 위한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리네르 선수와 맞붙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응원소리가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아직 4년이나 남았다. 김민종이 하늘을 감동시키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과연 4년 뒤에 김민종은 만나는 상대들로부터 “왜 하늘은 나를 낳고 김민종을 세상에 보냈는가”라는 한탄을 들을 수 있을까. 이번 패배에서 많은 것을 배운 김민종에게 4년 뒤 LA에서의 결말은 ‘해피엔딩’일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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