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반드시 돌아와서 직접 사죄해야”
가뜩이나 험악한 양국 관계에 ‘먹구름’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미국 외교관이 승용차로 초등학생 여아를 치어 숨지게 만든 사건의 파장이 확산하고 있다. 해당 외교관은 현지 경찰이 조사에 착수하자 면책 특권을 앞세워 짐바브웨에서 출국했다. 희생된 아동의 부모는 “사고를 낸 당사자가 직접 사과해야 한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미국 행정부는 지난 4월 부패와 인권침해 등을 이유로 에머슨 음낭가과 짐바브웨 대통령을 경제 제재 대상자로 지정하는 등 양국 관계는 썩 좋지 않은 편이다.
9일(현지시간) BBC 방송에 따르면 지난 6월3일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 남동쪽으로 40㎞쯤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초등학생 루바라셰 타캄하냐(11·여)가 등교 도중 승용차에 치여 사망한 것이다. 가해 차량 운전자는 짐바브웨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일하는 외교관 A씨였다. 그는 차에서 내려 긴급 구호 조치를 하거나 소녀의 보호자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고 그냥 사고 현장을 떠났다고 한다. 사실상 뺑소니 행각을 벌인 셈이다.
미국 대사관은 A씨가 일으킨 교통사고로 소녀가 희생된 사실을 인정했다. A씨를 대신해 동료 외교관들이 루바라셰의 부모에게 사과하고 장례식에도 대사관 측 대표가 참석했다. 미국 대사관은 장례식 비용 등 명목으로 2000달러(약 273만원)을 루바라셰 가족에 지원했다.
하지만 정작 A씨는 사고 후 외교관의 면책 특권 뒤에 숨었다. 현지 경찰이 조사를 위해 A씨에게 소환을 통보하자 그는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조사에 응하겠다”며 출석 연기를 요청했다. 이후 A씨는 짐바브웨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고 경찰 수사는 중단된 상태다.
루바라셰의 부모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딸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으며, 이 다음에 커서 비행기 승무원이 되고 싶어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루바라셰는 우리의 유일한 아이였다”며 “딸이 세상을 떠난 뒤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고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다”고 슬픔을 호소했다. 부모는 A씨의 행동에 분노를 표시하며 “반드시 미국에서 돌아와 우리 앞에서 직접 사죄해야 한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짐바브웨 정부도 A씨와 미국 정부를 겨냥해 “외교관의 면책 특권 뒤에 숨지 말라”며 압박을 가하고 나섰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BBC에 “외교관이 누리는 특혜에는 책임도 따른다”며 “주재국의 법을 준수하는 것은 외교관의 책임”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미 국무부는 “A씨를 대신해 대사관이 짐바브웨 경찰과 계속 소통하고 있다”는 원론적 입장만 내놓았다.
다만 미국과 짐바브웨 모두 A씨 문제가 악화할 만큼 악화한 양국 관계를 더 나쁜 방향으로 몰고 가선 안 된다는 입장이 확고한 것으로 보인다. 1980년 짐바브웨가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했을 때 미국은 즉각 정식 국가로 승인하고 외교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이후 짐바브웨가 소련(현 러시아) 등 공산권 국가들과 친하게 지내며 미국 등 서방을 적대시하자 두 나라는 서로 소원해졌다.
1987년 취임한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이 무려 30년간 집권하며 부패와 인권탄압을 일삼자 미국은 무가베를 독재자로 간주해 각종 제재를 가했다. 무가베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음낭가과가 2017년 대통령에 당선돼 새 정부가 출범했으나 미국의 제재는 계속되는 중이다. 이에 맞서 음낭가과 정권은 러시아 및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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