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전남 신안군 증도 돌마지 마을 모래섬에서 경찰에 끌려간 섬 주민 19명이 총에 맞아 숨졌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으로 진상을 규명한 증도면 등선리 희생 사건이다. 황모(1912년생·당시 38세) 씨는 이 사건의 희생자 19명 중 첫 번째 사망자였다.
황씨는 전남 신안 병풍도 소기점도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어민이자 농부였다.
1950년 전쟁 초기 신안 섬마을까지 인민군이 점령한 후 좌익이 지역을 장악했고, 그들은 일제강점기 병풍리 이장이었던 A씨 부자를 우익인사라는 이유로 총살했다.
그해 10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남 목포를 다시 수복한 국군은 신안 섬마을로 해병을 파견해 좌익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좌익에게 희생당했던 A씨 부자의 유족은 목포 수복 1주일쯤 후 경찰을 앞세워 병풍도 마을에 들이닥쳐 좌익과 부역자들을 색출한다며 주민들을 잡아들였다.
“자수하면 살려준다”며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한청) 사무실로 주민들을 유인해 연행했고, 다른 섬에 있던 황씨에게도 “배 젓는 노와 키를 가지고 오라”고 요구해 불러들였다.
섬을 장악한 경찰에게 좌익으로 몰린 황씨는 한청 사무실에 갇혀 구타당해 다리를 크게 다쳤다.
함께 붙잡힌 주민 18명과 함께 1950년 10월 21일 병풍도에서 끌려 나와 증도 모래섬 선착장에 도착한 황씨는 길을 재촉하는 경찰의 호통에 절뚝절뚝 힘겹게 다친 다리를 끌며 걸었다.
경찰은 증도 등선리의 한 야산으로 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걷지 못해 시간이 지체된다” 이유로 총탄 두발로 황씨를 사살했다.
황씨의 시신을 버려둔 경찰은 나머지 주민 18명도 등선리 야산으로 끌고 가 모두 총살했다.
이 같은 사실을 모른 황씨의 어머니는 한청 사무실로 밥을 해다 나르며 아들의 안부를 살폈지만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경찰이 그들을 포승줄로 묶어 증도로 끌고 갔다는 소식만 들렸고, 얼마 후에야 아들은 싸늘한 주검이 돼 돌아왔다.
법원은 좌익과 우익의 갈등에 휘말려 희생당한 황씨의 유족들에게 정신적 손해배상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광주지법 민사10단독 하종민 부장판사는 황씨의 유족 3명이 국가(대한민국)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고 18일 밝혔다.
하 부장판사는 "한국전쟁 시기 경찰이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황씨를 살해해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했고, 이에 따라 유족들이 정신적 고통을 받았음은 경험칙상 명백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원고 3명에게 모두 1억4400만원의 정신적 손해배상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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