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통일은 19세기 유럽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오랜 기간 여러 개의 소국으로 나뉘어 있어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던 독일인들도 근대에 이르러 점차 주변 강대국과 같은 통합된 큰 국가를 열망하게 되었다. 17세기의 30년전쟁부터 19세기 초의 나폴레옹 전쟁에 이르기까지 강대국의 침공을 겪은 독일 지역인들은 나를 지켜줄 큰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또한 독일의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통합하려는 관세동맹은 독일 지역에서의 산업화를 효과적으로 만들었고, 이는 독일 통합의 목소리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거기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가져온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사조가 통일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독일 지역 민중의 통일에 대한 열망은 ‘1848년 혁명’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당시 독일연방 국민의회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통일을 제안하며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황제로 추대하고자 했으나, 국왕은 이를 거부했다. 그는 다른 강대국과의 충돌이라는 현실적인 이유에 더해 민중이 주도하는 통일을 수용하기보다는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민족주의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고 통일에 대한 열망은 계속 타올랐다.
민중이 원하는 통일과 민족주의의 대세를 거스르기 어렵다고 판단한 프로이센의 수상 비스마르크는 위로부터의 통일을 강력히 추진했다. 통일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실현한 것은 비스마르크의 강력한 정치력과 외교 전략, 그리고 프로이센의 군사력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국내의 정치적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켰다. 외교적으로는 독일 통일의 경쟁 상대였던 오스트리아를 고립시키고 프랑스, 영국, 러시아와 같은 주변 강대국들이 통일 과정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판을 짰다. 덴마크와의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1864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년)에서의 승리는 독일연방 내에서 프로이센의 주도권을 확립하고 독일 통일을 반대하는 프랑스마저 굴복시키며,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을 이룰 수 있게 했다.
19세기 독일 지역의 시대 정신은 통일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 정신은 오랜 기간 군소국가로 쪼개져 있었던 독일이, 그들의 통일을 원하지 않았던 국제관계 속에서 이루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독일의 통일은 민중의 열망과 그 열망을 현실화시킨 강력하고 냉정하며 이성적인 지도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산물이었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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