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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의감성엽서] 페소아의 리스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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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8-20 23:30:14 수정 : 2024-08-20 23:3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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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무지 덥다. 펄펄 끓어오르는 태양열은 밤이 되어도 식을 줄을 모른다. 계속되는 열대야에 숨이 헉헉 막혀 밤 산책을 나선다. 매번 같은 길이라 오늘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 길이 늘 가보고 싶었던 리스본 거리라 상상하며 걷는다. 리스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 그 페소아의 리스본이라 상상하며 언덕길을 오른다. 일곱 개의 언덕으로 만들어진 도시답게 리스본엔 언덕들이 많다. 그 언덕 중 한 언덕길을 오르는 내 앞으로 이탈리아 작가 안토니오 타부키(1943~2012)가 걸어가고 있다. 커다란 트렁크를 들고. 무수한 페르난두 페소아로 가득 찬 낡은 트렁크를 들고. 그는 1960년대 파리의 어느 헌책방에서 페소아의 시집 ‘담배 가게’를 발견하고는 그의 광팬이 되었다. 1930년대 프랑스 초현실주의자들이 헌책방에서 로트레아몽을 발견하고는 광팬이 되었듯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영영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이다./무언가가 되기를 원할 수조차 없다./이걸 제외하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꿈을 품고 있다.”로 시작되는 ‘담배 가게’란 그 시에 반해 타부키는 그날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을 페소아 사랑에 바치리라 결심하고는 이탈리아에서 포르투갈로 날아와 이곳 리스본에 터를 잡았다. 그러곤 포르투갈의 페소아, 페소아의 리스본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그러면서 그는 언제나 문 없는 벽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뼛속까지 고독한 한 시인의 활짝 열린 문이 되어주었다. 시대를 초월한 작가들의 이런 위대한 사랑을 만날 때마다 나는 감격하고 감탄한다. 타부키가 아니었다면 페소아의 이 엄청난 유물 원고들, 2만7500여장이 넘는 이 원고들이 빛을 발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이 매혹적인 원고들을 읽으며 이토록 열광할 수 있었을까.

나는 타부키를 따라 포르투갈 석조 건물 중 가장 아름다운 제르니무스 수도원 언덕길을 오른다. 그 수도원엔 페소아가 묻혀 있다. 그들은 죽어서도 이탈리아에서 리스본으로, 리스본에서 이탈리아로 깊고 깊은 포옹을 나누기 위해 이렇듯 밤마다 서로를 그리워했구나. 나는 계속해서 타부키의 뒤를 따라간다. “나는 원래 있던 것을 잃었고, 다른 모든 것도 잃었다. 그제야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진정한 나 자신이 되었다. 우리의 전 생애는 꿈, 꿈일 뿐이다”라고 날마다 리스본의 별들을 향해 절규했던 페소아. 그 페소아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더 듣기 위해 유령이 되어서도 밤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언덕길을 오르는 안토니오 타부키, 무수한 페소아처럼 무수한 타부키.

언젠가 나도 그들과 합류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입 모아 말하는 ‘망자들의 특별한 정거장’인 페소아의 리스본에서.

그랬으면 참 좋겠다. 자신을 더 사랑하기 위해 겁 없이 그 사랑 속으로 뛰어든 타부키와 페소아의 숱한 이명(異名)들처럼.


김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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