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바이 수상한 모교 교수 "나와 내연관계, 유서 보관" 주장
2005년 6월 16일, 누구의 원한도 사지 않을 만큼 온화한 성품과 미인대회 출신의 어여쁜 외모를 가진 여성이 서울 성북구 돈암동의 한 미입주 아파트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숨진 여성은 부산의 한 대학을 졸업하고 국내 유명 K 대학교에 편입해 2004년 졸업한 뒤, 부동산 자산가 아들과 결혼한 지 1년밖에 안 된 새댁이었다.
12년 뒤인 2017년 8월 26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공개한 여성의 실명은 이해령(당시 30). 이 씨는 시체로 발견되기 일주일 전 실종신고가 접수된 상태였다.
◇돈암동 미입주 아파트 살인사건…자산가 며느리의 의문의 죽음
이 씨를 처음 발견한 건 청소업체 아르바이트생 A 씨였다. 그는 미입주 아파트에 홍보용 전단을 붙이는 일을 맡았고, 이때 한 집에서 유독 심한 악취가 풍겨왔다.
A 씨는 이 집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현관에 전단을 붙이면 관리사무소에서 떼어버리기 때문에 반드시 빈집 안으로 들어가 붙박이장이나 화장실 문 등에 전단을 붙여야 했다.
일을 대충 했다가는 사장한테 혼이라도 날까 무서웠던 A 씨는 현관문 손잡이를 조심스레 잡고 돌렸고,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들어가 보니 악취는 더욱 심했고, 악취의 근원지가 안방 화장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문을 열자 각목이 부딪치듯 '쿵'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A 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화장실 바닥에는 부패한 상태의 이 씨의 시체가 있었다.
당시 이 씨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가슴 부위 쪽이 찢어져 있었고 속옷은 벗겨져 발목에 걸쳐 있었다. 어깨엔 손가방을 멘 상태였고, 가방 안에는 휴대전화, 신분증, 신용카드, 상품권, 현금 등 소지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강도의 가능성은 낮았다.
이 씨의 시신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패한 상태였다. 목에 있던 작은 상처 외에는 별다른 외상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국과수 부검 결과 설골 골절이 의심된다는 소견이 나왔다.
이를 미루어 보아, 범인은 이 씨를 상대로 성폭행을 시도했다가 이 씨가 격렬히 반항하자 목 졸라 살해한 뒤 도주했다는 가설이 세워졌다.
◇찢긴 원피스에 벗겨진 속옷…정액 반응 '음성', 알코올은 '만취'
이 씨의 최종 소재가 확인된 날은 6월 9일, 경찰은 이날을 사망 추정일이라고 보고 행적을 확인해 봤다.
이 씨는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오전 9시에 집에서 나왔다. 오전 11시쯤 결혼을 앞둔 동생이 입을 한복을 보러 한복집에 방문했다. 이후 인근 식당에서 도시락을 구입하고 K 대학교 B 교수를 찾아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 씨는 B 교수의 부탁으로 졸업 후에도 가끔 학교에 나가 학술행사 자원봉사 활동을 하느라 매일 학교에 갔다. 이날은 며칠 전에 끝난 학술행사 뒷정리 및 B 교수에게 인사차 학교에 방문한 것으로 추정됐다.
이후 이 씨는 자원봉사를 같이 한 후배들과 통화한 뒤 교내에 있는 은행에 들렀다. 오후 2시 33분쯤 은행에서 나와 지하철역 방향으로 걸어간 것이 이 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파트는 미입주 상태로, 주차장 일부 구역 외에는 CCTV가 작동하지 않았다. 또한 이 씨를 목격한 이도 없어 수사는 난항에 빠졌다.
여러 정황상 강간 살해가 의심됐으나, 정액 반응 검사에서 '음성' 소견이 나왔다. 간과 비장에서는 알코올 농도가 0.14% 검출됐는데, 이는 이 씨가 숨질 당시 만취 상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이 씨 측근들은 이 씨가 평소 술을 즐겨하지 않고, 만취할 때까지 마신 적이 없었으며 숨지기 전 4개월 넘게 위장병 치료를 받고 있는데도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 점을 의아해했다.
화장실 외에는 출입구부터 안방까지 강제로 끌고 간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치정이나 원한에 의한 살인을 의심했고, 면식범의 소행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경찰은 이 씨의 주변 인물로 수사망을 좁혀 세 명을 용의선상에 올렸다. 이 씨의 남편, 전 남자 친구 그리고 식사를 함께한 B 교수가 집중 조사 대상이 됐다.
이 씨 몸에서 발견된 DNA를 세 사람과 비교해 봤지만, 일치하는 사람은 없었다. 또 이 씨 남편과 전 남자 친구는 실종 당일 알리바이가 확실해 용의선상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B 교수의 행적은 어딘가 수상했다.
◇교수의 수상한 행적…남편·전남친에 연락 뒤 유서 제출
먼저 B 교수는 이날 교수회의에 참석한 뒤 곧바로 학교 근처 중국집에서 교수단 회식을 했다고 진술했다. 식당에는 7시 15분쯤 도착했다고.
그러나 중국집 종업원은 B 교수가 예약 시간보다 30~40분 늦게 왔다며 "시간은 8시 10분쯤으로 기억한다"고 주장했다. 종업원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B 교수는 약 1시간 10분 정도의 행적이 비게 되는 것이다.
범행 추정 시각은 오후 4시에서 7시 30분 사이다. 교수의 알리바이가 분명치 않은 시각하고 겹치는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B 교수는 회식 후 술을 마신 상태에서 이 씨 남편과 전 남자 친구에게 돌연 이 씨의 행방을 물었다. 이때는 이 씨가 실종된 사실을 아무도 몰랐고, 실종신고도 되지 않았을 때다.
아울러 B 교수는 경찰에게 "이 씨가 전 남자 친구와 같이 있을 것"이라며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B 교수는 이 씨에게 타살 정황이 있음에도 극단 선택한 것처럼 몰아가기도 했다. 그는 "내 컴퓨터에 이 씨가 쓴 유서가 있다. 암호가 걸려 있었는데, 내가 풀었다"며 경찰에 제출했다.
이 씨의 유서를 갖고 있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른 학생이 도와줬다"며 한 학생을 지목했다. 하지만 해당 학생은 "제가 도왔다고요? 처음 듣는데. 전 타살이라고 알고 있다. 유서 발견이 무슨 말이냐"고 깜짝 놀랐다.
한편 이 씨의 어머니는 결혼식에도 참석할 만큼 친분이 두텁고 마지막에 딸을 만난 사람이 B 교수이기에, 그를 가장 먼저 찾아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러자 B 교수는 "어머니는 그런 얘기 못 들었어요? 이 씨가 그러는데, 남편한테 애인이 있다고 하더라"라고 주장했다.
이에 깜짝 놀란 이 씨 어머니는 사위를 찾아가 물었고, 사위는 눈물만 흘렸다고. 이후 사위는 이 씨의 장례 절차를 함께 하고 5년 내내 기일마다 찾아왔다고 한다. 이에 이 씨 어머니는 잠시나마 사위를 오해했다며 괜한 말을 전한 B 교수를 원망했다는 후문이다.
이 씨 남편은 "B 교수가 날 용의자로 지목했다더라"라며 "난 이혼 생각한 적도 없다. 제게 여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근거가 없는 사실이다. 모두 B 교수의 주장이다. 유서도, 암호도 교수만 알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 된다"고 황당해했다.
동시에 남편은 아내 이 씨로부터 "B 교수가 이혼하려고 해서 집을 알아보고 있다. 혼자 다니는 게 힘드시니까 내가 같이 봐주려고 한다. 또 내가 여기 지리를 잘 알지 않느냐"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남편은 "그래서 전 해령이가 거기서(미입주 아파트) 발견됐을 때, 바로 B 교수가 생각났다"며 의문을 품었다.
◇DNA 발견 소식에 "사실 내연관계" 뜬금 주장…19년간 '미제'
반면 B 교수는 "내가 보기엔 남편이 저쪽(경찰)에다가 이야기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며 되레 남편을 의심했다.
B 교수는 이 씨와의 관계에 대해 당초 "친한 교수와 학생 사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이 이 씨 시신에서 범인의 DNA가 나왔다고 하자, B 교수는 갑자기 "사실 우리는 내연관계였고, 실종 당일에도 육체적 접촉이 있어서 내 DNA가 나올 수도 있다"고 말을 바꿨다.
두 사람을 잘 아는 지인들은 말도 안 된다며 "내연관계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B 교수의 주장을 반박했다.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졌다. 범죄 전문가들은 이 씨 몸에서 나온 DNA를 '범인의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봤다. 해당 미입주 아파트에 여러 사람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DNA가 묻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더운 날씨에 DNA가 오염돼 변질될 수 있어 DNA 대조를 절대적 기준으로 보는 게 맞지 않다는 시각이다.
범행 현장에는 이 씨와 몸싸움하는 과정에서 범인의 옷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남성용 단추가 하나 발견됐다. 미국의 골프복 '애쉬워스' 제품이다. 고가 브랜드로, 주 고객층은 30~50대다. 마지막 단서인 셈이다.
이번 사건은 19년간 미제로 남았지만, 태완이법 덕분에 공소시효가 폐지됨에 따라 진범을 잡으면 처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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