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의 한국 현대사/ 이동해/ 푸른역사/ 1만7900원
“(아산시) 선장면 군덕리 집에 라디오가 있어서 틀으니까, 인민군이 어디로 왔다, 어디로 갔다, 국군이 어디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금성리에 있을 때) 우리 동네 앞길을 그냥 바로 지나가는 거야. 인민군 총이 굉장히 길어. 거기다 칼을 꽂아 메면은, 사람은 작은데 총이 높이 있어. 당시에 고등학교, 중학교 나온 애들이 가면 총을 메어 보냈어.”
양천 허씨 17대 장손으로 태어나 아산에서 살던 10대의 허홍무씨는 한국전쟁이 발발할 당시 라디오를 들으면서 어느 정도 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가족은 여러 고민 끝에 피란을 가지 못하고 마을에 그냥 머물렀다.
“인민군이 쳐들어와서는, 동네 빨갱이들을 통해서 저녁마다 회의를 하는 거야. 그냥 아무 안건도 없이 ‘회의한다, 모여라, 안 나오는 놈은 모두 때려죽인다’ 이렇게 공포스럽게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누구랄 것도 없이 다 모였어. 그걸 매일 해. 안 나오는 사람은 반동분자로 찍히고. 오늘 할 일, 내일 할 일, 이런 거 얘기하고. 나도 회의에 참석했었어. 학생이고 뭐가 안 나오면 다 죽인다고 그래 가지고.”
박사과정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공하고 있는 저자는 책에서 어찌 보면 ‘무명인’인 외할아버지 허홍무씨의 구술을 바탕으로 접하기 쉽지 않은 한국 현대사의 미시사를 흥미롭고 생생하게 그려냈다.
저자는 무명인 구술에서 제기될 수밖에 없는 사실관계의 신빙성 문제와 역사적 의미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서 ‘마을지’나 ‘총독부 관보’ 등 공식 문헌부터 시작해 구술자의 호적부, 학교 생활기록부, 군대 거주표 등 다양한 자료를 확보해 검증을 시도했다. 특히 구술 내용 중심의 기존 구술생애사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맥락 찾기, 검증하기, 특정하기라는 세 가지 방법을 도입해 구술의 사실관계 및 의미 분석에 초점을 두었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아산의 중소 지주가 지역 유지로서 삶을 영위하는 법, 일제 말기 금광 투자에 실패해 집안이 몰락하는 과정, 지주 출신이 한국전쟁 중 북한 점령 치하에서 겪은 일, 정전 직후의 군 생활까지 이름 없는 개인이 직접 부딪친 역사의 물줄기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개인의 선택이었지만 창씨개명을 조장하는 일제강점기 분위기(45쪽), 해방 직후 중학교 입시제도의 변화(112쪽), ‘인공 치하’ 전후 좌우익의 학살로 얼룩진 아비규환(165~167쪽) 등 흥미진진한 내용뿐만 아니라, 가마니가 일본의 ‘가마스’에서 전래되었다든가(64쪽), ‘몸빼’가 조선 여성의 전시 복장으로 통일된 사연(94쪽) 등 역사 교과서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사실도 엿볼 수 있다.
책은 무명인 허홍무씨의 경험과 생각이라는 돋보기를 통해서 1935년부터 1959년까지 한국 사회를 구석구석 조명함으로써 사건과 제도, 주요 인물을 중심의 기존 역사 서술에선 볼 수 없는 새로운 재미와 흥미를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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