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정부 시절인 1975년까지 대한민국엔 ‘국제연합절’(10월24일)이란 법정공휴일이 있었다. 1945년 10월24일 유엔이 창설된 것을 기리는 이 날은 ‘유엔의 날’ 또는 ‘유엔절’로도 불렸다. 유엔은 남북이 영구 분단의 위기에 처한 1948년 ‘남한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결의안을 채택해 한국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1950년 북한이 6·25 기습남침을 강행했을 때에는 회원국들에게 “병력과 물자, 의료진을 보내 한국을 도와야 한다”고 권고했다. 유엔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북한이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고 한국은 지도에서 영영 사라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 정부가 유엔 창설일을 공휴일로 지정한 것은 유엔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유엔절은 1976년 법정공휴일에서 제외됐다. 국제 외교 무대에서 한국과 치열하게 경쟁하던 북한이 1970년대 중반 들어 만국우편연합(UPU),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세계보건기구(WHO) 같은 유엔 산하 전문 기구에 잇따라 가입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남한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는 유엔 결의를 유엔 스스로 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엔절을 대신해 1976년부터 새롭게 법정공휴일에 추가된 날이 바로 ‘국군의 날’(10월1일)이다. 6·25전쟁 도중인 1950년 10월1일 국군이 개전 당시 남북한의 경계선이었던 38선을 돌파해 본격적인 북진에 나선 것을 기리는 날이다. 해마다 국군의 날이면 우리가 보유한 첨단 무기를 국민들에게 선보이고 장병들의 위풍당당한 시가행진을 통해 군의 사기를 드높였다.
안타깝게도 국군의 날이 달력 위의 ‘빨간 날’로 존속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법정공휴일 지정 15년 만인 1991년 당시 노태우정부는 국군의 날을 평일로 환원시켰다. 공식적인 사유는 “기업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였다. 10월3일이 공휴일인 개천절이고 그 즈음에 추석(음력 8월15일) 연휴가 도래하기도 하는데, 10월1일까지 쉬어 버리면 나라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근로자들의 근무기강도 해이해진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같은 논리로 한글날(10월9일) 또한 공휴일에서 빠졌다. 이후 박근혜정부 시절인 2013년 한글날은 다시 공휴일이 되었다. 국어학자 등 학계와 문화계 인사들이 끈질기게 정부를 설득한 결과였다. 반면 국군의 날은 현역 및 예비역 군인들의 노력이 부족한 탓인지 계속 비(非)공휴일로 남았다.
정부가 3일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올해 국군의 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국군의 날이 평일로 전환된 1991년 이후 무려 34년 만의 일이다. 한 총리는 “국군의 역할과 장병들의 노고를 상기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고 이유를 밝혔다. 군과 안보를 중시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된 조치가 아닌가 싶다. 윤 대통령은 여름 휴가 도중인 지난 8월9일 육해공 3군 본부가 있는 충남 계룡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휴가를 군과 함께 보내는 것이 나에겐 진짜 휴가”라고 말해 장병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예로부터 군대는 사기(士氣)가 곧 생명이라고 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옛말이 있다. 국군의 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한 결단이 군의 사기 진작으로 이어지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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