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인효과·혁신 동력 저해 우려에
사전 지정 대신 ‘사후 추정’ 제시
1개 회사 시장 점유율 60% 이상 등
규제 대상 사업자 미리 파악 방식
업체에 반경쟁행위 입증책임 부여
쿠팡·배민 등은 규제 피해 갈 듯
해외 업체 매출액 규모 축소 등에
국내 기업 역차별 가능성도 제기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해 12월 추진 방침을 밝혔던 ‘플랫폼 공정경쟁촉진법’을 9개월 만에 철회한 건 사전지정제를 둘러싼 비판 여론이 상당했던 탓이다. 업계 등에서는 특정 플랫폼을 사전 지정해 규율하는 건 이른바 ‘낙인효과’를 가져올 수 있고, 국내 기업의 혁신동력을 저해한다는 의견이 지속해서 제기돼왔다. 공정위는 이에 사전지정제 도입에 따른 불필요한 논란을 없애는 동시에 비슷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사후추정’ 방식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사후추정 요건을 통해 대략 지배적 플랫폼을 파악한 뒤 이들이 자사우대 등 4대 반경쟁행위를 하면 즉시 입증책임을 부과해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처벌 수위도 기존보다 높인다는 복안이다.
9일 공정위에 따르면 이날 당정 협의를 통해 나온 이번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시장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높은 소수의 지배적 플랫폼이 자사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경쟁플랫폼 이용 금지), 최혜대우 요구(타사 플랫폼보다 유리한 거래조건 강요)를 하면 이를 신속히 차단해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특정 기업을 사전 지정해 규제 대상으로 공표하기보다 지배적 플랫폼의 요건을 구체적으로 정한 뒤 이 기준에 맞는 사업자가 반칙을 하면 ‘맞춤형’ 제재에 나서겠다는 방침이다.
그간 온라인 플랫폼 독과점과 관련한 각종 자사우대 행위가 빈번했지만 ‘뒷북 제재’라는 비판이 제기돼왔다. 실제 지난해 2월 공정위가 제재한 카카오모빌리티의 알고리즘 조작을 통한 자사 가맹택시 우대 사건 등을 살펴보면 시장 진입 자체를 방해하는 행위가 이뤄지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과징금 부과와 시정명령이 내려졌다. 이는 급변하는 온라인 시장에서 관련 시장을 획정하고, 경쟁제한성을 입증해야 하는 점이 쉽지 않은 탓이다. 공정위가 당초 사전지정제를 도입하려 했던 것도 시장지배적 사업자 및 관련 시장을 획정하는 절차를 줄이기 위한 목적이 컸었다.
공정위는 앞으로 사후추정 요건을 활용, 규제 대상 사업자를 미리 파악하는 방식을 도입해 제재 속도를 높이기로 했다. 주기적으로 실태조사를 해 사후추정 요건에 맞는 사업자를 대략 파악하면 나중에 시장 획정 등에 따른 절차를 줄여 사건을 빨리 처리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공정위는 사후추정 요건으로 ‘1개 회사 시장 점유율이 60% 이상이고, 이용자 수 100만명 이상’ 또는 ‘3개 회사 시장 점유율 85% 이상이고, 사별 이용자 수 2000만명 이상’으로 제시했다. 다만 직간접 매출액(계열사 포함)이 4조원이 되지 않으면 지배적 플랫폼에서 제외된다.
공정위는 지배적 플랫폼이 중개, 검색, 동영상,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운영체제, 광고 등 6개 서비스에서 4대 반경쟁행위를 하면 입증책임도 규제 대상에 부과하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공정위가 시장지배적 사업자인지를 판단한 뒤 자사우대 등과 관련한 경쟁제한성까지 입증해야 했다. 앞으로는 규제 대상 업체 측이 경쟁제한성이 없다는 점을 입증하지 못하면 곧바로 제재에 나설 수 있게 됐다.
공정위는 이와 함께 △4대 반경쟁행위 위반이 명백하고 △경쟁 제한이 회복 곤란한 경우 △이용자 손해 확산 우려로 예방의 긴급 필요성이 인정되면 반경쟁행위를 차단하는 임시중지명령도 시행하기로 했다. 아울러 과징금 상한 역시 관련 매출액의 6%에서 8%로 높인다는 계획이다.
다만 사후추정 요건을 두고 규제 대상 업체 측이 반발하면 개정안 취지대로 신속하게 조사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한기정 공정위원장은 “사후추정 기준이 공정거래법상 시장지배적 사업자 기준(1개 회사 시장 점유율 50% 이상)보다 조금 더 엄격하게 돼 있기 때문에 그 요건에 해당되면 지배력이 인정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주기적 실태조사를 통해 신속한 추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면 ‘신속한 사건 처리’라는 입법 목적을 상당 수준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사후추정의 기준이 공정거래법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높은 매출 기준과 점유율 요건으로 설정된 만큼 쿠팡과 배달의민족 등 주요 온라인 플랫폼이 규제를 피해갈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개정안에 담긴 사후추정 요건을 충족하는 기업은 지난해 매출액 기준으로 보면 구글과 애플, 카카오, 네이버 정도로 분석된다.
구글이 지난해 매출액을 3000억원대로 신고하는 등 해외 업체들이 매출 규모를 감추는 상황에서 국내 기업만 더 심한 규제를 받는 것 아니냐는 ‘역차별’ 논란도 제기된다. 공정위 관계자는 “직간접 매출액을 다 포함해서 사후추정 요건을 적용하기 때문에 실제 매출액이 작아서 빠지거나 그러진 않을 것”이라며 “구글에도 매출액 산정을 통해 과징금을 부과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번 당정 결정에 대형 플랫폼사들은 별도 입장을 내진 않았지만, 시장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큰 지배적 플랫폼을 상대로 사전 지정이 아닌 사후 추정해 규율 대상을 정하도록 한 데 대해 환영하는 눈치다. 그간 한국인터넷기업협회를 비롯해 정보기술(IT) 업계는 공정위의 자의적 집행이 가능한 추상적인 ‘정성요건’을 고려한 사전지정제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왔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