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전투(Battle of France)는 끝났습니다. 나는 영국 전투(Battle of Britain)가 시작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초반인 1940년 6월18일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는 하원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그 직전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굴복했다. 처칠이 말한 ‘영국 전투’의 정확한 모습이 무엇일지는 예측이 어려웠다. 이제 세계 최강의 육군을 거느린 히틀러는 독일 해군에 상륙작전 준비를 명령했다. 섬나라 영국에 독일 군대가 상륙하면 겁에 질린 영국은 항복할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독일 해군은 난색을 표했다. 막강한 영국 해군이 버티는 한 독일 함대가 병력과 장비를 싣고 영불해협을 안전하게 건너긴 어렵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자 독일 공군이 나섰다. 전투기와 폭격기로 영국의 군항, 비행장 등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제공권을 장악하면 상륙작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영국 전투의 형태는 일단 양국 공군의 공중전 양상이 되었다.
히틀러의 핵심 측근인 헤르만 괴링 공군 원수는 영국 공습에 ‘독수리 공격’이란 이름을 붙였다. 본격적인 전투는 1940년 8월13일 개시했다. 독일 공군은 엄청난 규모의 전투기와 폭격기를 동원해 영국을 공격했으나 성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영공 방어에 나선 영국 전투기 성능이 독일 것보다 우수했기 때문이다. 공중전이 벌어질 때마다 격추되는 독일 군용기 숫자가 늘 더 많았다. 숙련된 조종사는 워낙 중요한 자원이어서 전사하거나 부상하면 한동안 대체가 어려웠다. 전투가 계속되며 영국 공군도 조종사 부족을 겪었으나 그래도 훈련과 충원 면에서 독일에 비해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그 시절 히틀러의 나치즘에 맞서 싸우는 자유 진영의 전사는 영국 공군 조종사들뿐이었다. 훗날 처칠이 “인류의 전쟁터에서 그렇게 적은 사람들(조종사)에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큰 빚을 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찬사를 바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밀고 밀리는 처절한 공중전은 1940년 9월15일 절정에 달했다. 그날 독일 공군은 두 차례에 걸쳐 총 350∼400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런던을 공습했다. 영국 공군도 가용한 항공기를 모두 출격시켜 맞대응에 나섰다. 영국 전투기의 날렵한 기동에 독일 폭격기들의 대형은 흐트러졌고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하루 동안 영국은 군용기 26대를 잃은 반면 격추된 독일 군용기는 60대에 달했다. 숫자의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장병들의 사기였다. ‘영국 공군은 곧 무너질 것’이라던 독일 공군의 믿음은 더는 지속되기 어려웠다. 사력을 다했는데도 영국 공군은 여전히 살아남아 철벽 같은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영국인들로선 알 수 없었던 사실이지만 그로부터 불과 이틀 뒤인 1940년 9월17일 히틀러는 영국 상륙작전의 무기한 연기를 명령했다. 제공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독일 함대를 출동시켜봐야 커다란 희생만 따를 뿐이란 계산에 따른 조치였다.
2차대전이 아직 진행 중이던 1943년 영국 국왕 조지 6세(엘리자베스 2세의 부친)는 9월15일을 ‘영국 전투의 날’로 지정해 공군 조종사들의 노고와 희생을 기리도록 했다. 15일 제84주년 영국 전투의 날을 맞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선 키어 스타머 총리, 공군 지휘부, 2차대전
참전용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기념식이 열렸다. 영국 전투는 1939년 9월1일 2차대전 개전 이후 줄곧 승승장구하던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처음 겪은 좌절이었다. 물론 그것은 영국이 유럽 대륙과 바다로 격리된 섬나라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본질적으로 방어전 성격이 짙은 영국 전투에서 영국이 이겼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나치 독일의 패퇴로 이어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영국 국민의 사기 그리고 미국 등 아직 2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은 국가들의 정세 판단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그 시기 나치 독일과 교전 중인 나라는 주요국 가운데 영국이 유일했다. 영국 홀로 자유 진영의 운명을 등에 짊어지고 치열하게 싸웠던 영국 전투 기간을 오늘날 영국인들이 “가장 좋았던 시절”(The Finest Hour)로 기억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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