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액을 받고 전업 작가로서 길 걸어
美 공포 장르 대표 작가이자 제작자
가난한 학생서 베스트셀러 작가까지
굴곡진 인생 여정·작품 연대별로 담아
스티븐 킹 마스터 클래스/ 베브 빈센트/ 강경아 옮김/ 황금가지/ 3만3000원
캐리/ 스티븐 킹/ 한기찬 옮김/ 황금가지/ 1만7000원
홀리/ 스티븐 킹/이은선 옮김/ 황금가지/ 2만1000원
새 글감이 떠오르지 않아서 한 해 전에 끼적거렸던 글들을 꺼내서 들춰봤다. ‘여성의 관점에서 글을 써보라’는 친구의 도발에 대한 화답으로 썼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염력을 지닌 10대 왕따 소녀에 관한 이야기. 잡지에 기고하기 위해서 좁은 줄 간격으로 빼곡히 써내려간 네 장 분량의 원고였다.
음, 소설이 제대로 폭발하려면 더 긴 도화선이 필요해 보이는군. 하지만 그에겐 새 장편소설을 써내려갈 시간이 없었다. 당시 세 편의 장편을 완성했지만 출판사와 계약을 맺지 못하고 생계와 창작 사이에서 지쳐가고 있었다. 그는 원고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런데 집을 청소하던 아내가 쓰레기통에서 버려진 원고를 발견했다. 원고를 읽던 아내 태비사는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 알고 싶다며 그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다시 10대 소녀 캐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몇 차례 위기 속에서도 초고 ‘캐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
초고는 100쪽이 채 되지 않았다. 단편소설로 발표하기는 너무 길었고, 장편소설로 출간하기에는 너무 적은, 애매한 분량이었다. 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던 그는 신문 기사와 논문, 새 장면을 추가해 길이를 늘렸다. 늘린 원고를 출판사에 보낸 뒤 답변을 기다리는 사이, 그는 다른 장편을 쓰기 시작했다.
“해냈어요. ‘캐리’는 더블데이에서 공식 출간됩니다. 선인세는 2500달러입니다. 전화하면 이 멋진 소식에 관해 자세히 알려드리죠. 축하해요. 앞날에 펼쳐질 꽃길을 즐기세요.”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인 스티븐 킹은 1974년 염력을 가진 소녀 캐리 화이트가 펼치는 피의 복수극을 그린 데뷔작 ‘캐리’를 출간할 수 있었다. 그는 거액을 받고 문고판 판권을 팔면서 비로소 전업 작가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됐고, 1976년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되면서 400만부 가까이 판매됐다. 킹이 대중 작가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스티븐 킹은 공포 장르를 대표하는 미국 작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이고, 영화 제작자다. 그의 책은 전 세계 50여개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장편소설 대부분이 영화화하는 등 할리우드 영화 원작 소설을 가장 많이 쓴 작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와 함께 편집 작업을 하기도 한 논픽션 작가인 저자는 킹의 데뷔 50주년을 맞아 펴낸 책 ‘스티븐 킹 마스터 클래스’에서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명인 킹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총망라해 정리했다. 1947년 미국 메인주의 포틀랜드에서 도널드 킹과 루스 킹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난 킹이 가난한 대학생에서, 가정을 지탱하려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교사로, 그리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까지 인생 여정과 작품을 연대별로 다양한 에피소드와 함께 담았다.
“네가 듣기에는,” 어머니는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면서 어린 아들 킹에게 말했다. “너무 무서워.” 킹은 어머니의 말이 자신의 방에 들어가라는 이야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가 방에 들어가면 혼자 공포물 ‘디멘션 X’를 들었다.
하지만 어린 킹은 자신의 침대에서 몰래 빠져 나와서 거실과 통하는 문을 살짝 열어둔 채 라디오 방송을 엿들었다. 라디오 방송이 끝나면 다시 침대로 몰래 들어간 뒤, 혼자 공포에 전율하곤 했다. 어릴 때부터 무서운 것을 즐기게 된 킹은 곧 독서광이 됐고, 여섯 살 때부터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만화책을 읽은 뒤, 만화책에 나온 글에 자기만의 설명을 덧붙여 산문을 재탄생시키며 글쓰기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어린 시절 편모슬하에서 자란 킹은 주변의 애정과 헌신적인 지지 덕분에 작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모는 그가 취미로 쓴 습작을 재미있게 읽어주면서 편당 25센트의 용돈을 줬다. 그는 곧 많은 작품을 쏟아냈다. 이모의 다락방에선 아버지가 애독하던 1940년대 중반의 문고본 SF소설과 공포 소설이 가득한 상자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즈음부터 형이 발간하던 동네 신문에 자신의 소설을 연재하기도 했고, 다른 매체에 투고를 시작했다.
1971년 대학 시절 같은 도서관 근로학생으로 만난 태비사 스프루스와 가정을 꾸리고도 금전 문제로 한동안 세탁일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던 킹에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생활고였다. 수없이 원고를 투고했지만, 수없이 거절됐다. 침실 벽에 수두룩한 투고 거절 통지서를 모아 꽂아두었을 정도였다.
책에는 이밖에 눈길을 끄는 일화가 수두룩하다. 킹이 필명 ‘리처드 바크만’으로 작품을 몰래 집필하는 과정과 정체가 들통 난 사건, 집필할 때 사전 자료 조사를 하지 않는 습관, 밴드를 꾸릴 정도로 록을 좋아해 라디오 방송국을 통째로 산 일화, 야구광으로서 직접 야구에 관한 집필을 하며 벌어진 일,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수많은 영상 속 카메오로 출연하거나 직접 제작에 참여한 이야기, 1999년 자동차에 치여 목숨을 잃을 뻔하고 은퇴를 선언한 일화, 전미도서상을 수상하려다 사고 후유증이 재발해 죽음 문턱까지 간 사연 등등.
1974년 데뷔작 ‘캐리’부터 최신작 ‘홀리’까지 60여편에 이르는 킹의 모든 출판물을 소개하고 주요 작품의 출판 비하인드나 글감도 자세히 담겨 있다. 영화로 유명한 원작 소설 ‘샤이닝’은 아내와 함께 떠난 짧은 휴가에서 방문한 호텔이 겨울맞이 휴업을 준비하는 광경에서 영감을 얻었고, 한국에도 잘 알려진 대표작 ‘미저리’는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던 중 한 여성에 대한 꿈을 꾼 직후 기억나는 장면을 휴지에 써 내려 간 내용을 기반으로 집필했다고.
책은 킹의 서신과 자필 원고, 초판 표지, 공개된 적 없었던 그의 시 등 140여장의 이미지도 수록했다. 이와 함께 데뷔작 ‘캐리’의 50주년 리뉴얼판과, 최신작 ‘홀리’도 동시에 출간됐다. 아마도 신이 그를 멈춰 세우지 않는 한, 그는 글을 쓰고 또 쓰고 있을 것이다.
“그건 제가 아니라 신이 결정할 일입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저도 알게 되겠죠. 책상에 앉은 채로 고꾸라지거나 아이디어가 고갈되거나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중요한 건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거예요. 스스로가 아직 썩 괜찮다고 느끼는 한, 글쓰기를 멈추는 일은 없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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