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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저널] 정조가 강화도에 외규장각 세운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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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10-28 23:29:56 수정 : 2024-10-28 23:2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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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화재 위험 피해 안전지대에 새로 건설
佛, 병인양요 때 의궤 약탈… 2011년 반환

가을은 여행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서울 근교에 가볼 만한 곳으로 필자는 강화도를 추천하고 싶다. 강화도에는 선사시대의 고인돌부터 고려, 조선, 근대의 역사 유적이 다수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해안을 끼고 있는 만큼 미식 여행으로도 적합한 곳이다. 자전거를 타고 코스모스길을 따라가는 것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다. 필자는 강화도에서 생산되는 순무 김치, 소금에 구운 새우 요리를 특히 좋아한다.

강화도는 조선의 왕 정조와도 깊은 인연이 있다. 1782년(정조 6년) 2월 ‘외규장각(外奎章閣) 공사의 완공’을 알리는 강화 유수(留守)의 보고가 올라왔다. 1781년 3월 정조가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지을 것을 명한 지 11개월이 지난 즈음이었다. 이를 계기로 외규장각에는 의궤(儀軌) 등 왕실의 주요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보관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80여년 동안 외규장각은 조선후기 왕실 도서를 보존하는 중심기관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1784년에 편찬된 ‘규장각지(奎章閣志)’에 따르면, 외규장각은 6칸 크기의 규모로 왕의 임시 궁궐로 활용된 행궁(行宮)의 동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76년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 왕실도서관 규장각을 짓고 학술, 문화 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그런데 정조가 늘 걱정한 것은 규장각이 궁궐 안에 위치하여 전쟁이나 화재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때 정조의 눈에 들어온 곳이 강화도였다. 강화도는 고려후기 몽골족이 쳐들어 왔을 때 임시수도로 활용되었고, 정묘호란 때 인조가 피란을 한 곳이었다. 그만큼 국방 요충지로 인식되었기에 정조는 이곳에 외규장각을 지은 것이다.

정조는 왕이 열람하도록 제작한 어람용(御覽用) 의궤는 외규장각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의궤는 왕실의 주요 행사를 기록과 함께 그림으로 정리한 책으로, 200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혼례식, 장례식 등의 행사가 끝나면 5부에서 8부를 제작하여 산간 지역 사고(史庫)와 관련 부처에 보관하였다. 왕이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는 비단으로 표지를 했으며, 고급 종이인 초주지(草注紙)를 사용하였다. 특히 채색으로 그린 그림들은 화려함과 품격을 더해준다.

1866년 프랑스 군대의 침공으로 시작된 병인양요로 인하여 외규장각은 잿더미가 되었다. 당시까지 보관되어 있던 외규장각 도서 목록을 정리한 자료에 의하면, 이때까지 6000여 책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불에 탄 것이다.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의궤들은 집중적으로 본국으로 가져갔다. 그들의 눈에도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있던 297책의 의궤는 오랜 반환 노력 끝에 2011년 고국으로 돌아왔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866년 강화도를 침공했던 프랑스 해군장교 주베르는 ‘이곳에서 감탄하면서 볼 수밖에 없고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무리 가난한 집에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선조들이 책을 가까이 접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책 읽는 붐이 일어나고 있다. 규장각과 외규장각에 담긴 정조의 정신까지 기억하며 가을날의 독서에 나서 보면 어떨까?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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