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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진

주머니에서 팥이 줄줄 흘러나왔다 팥들은 사방으로 굴러다니며 비명을 질렀다 “무서운 일이 일어날 거야!” “조심해!” 시끄러운 녀석들 때문에 가는 곳마다 곤란한 일들이 생겼다 주워 담으려 해도 잡히지 않았다 팥들을 잘 달래가며 키우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훌쩍 낡아 있었다 다행인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대체로 평온했다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며 팥들은 멀리 굴러가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 남겨졌을 땐 주머니에 팥을 넣어둔 이를 떠올렸다

옛사람들은 붉은 팥에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신묘한 힘이 있다고 여겼다. 이따금 특별한 날 프랜차이즈 죽집에 앉아 뜨거운 팥죽을 후후 불어 먹으면서는 그런 힘을 나도 좀 믿고 싶었을까. 마치 부적처럼, 팥알을 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사람도 있는가 보다.

 

불행이나 고통이 몰래 기어들려 할 때마다 주머니 속 낱낱의 팥들이 구르며, 비명을 지르며 “조심해!” 일러준다면…. 다소 곤란할지언정 정말 “무서운 일”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매사 조심조심 “대체로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별고 없이 무탈하게. 병도 사고도 없는 무탈(無?)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염원”이 아닌지.

 

팥이라니, 결국 다 미신 아니겠냐며 혹자는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평안을 바라는 지극한 마음을 어떤 식으로든 간직하고 되뇌는 일은 귀하다. 콩이든 팥이든, 다른 무엇을 빌려서든. 정말 중요한 것은 주머니 속에 든 팥이 아니라 내 주머니에 팥을 넣어둔 그 사람일 것이다.

 

박소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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