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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일본어 완역 요시카와 및 시미즈 “700명의 살아 있는 인물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입력 : 2024-11-10 06:35:10 수정 : 2024-11-10 06:3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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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 스무 권을 일본에서도 완역해 출간하고 싶으니, 번역을 좀 맡아서 해 달라.”

 

한국문학 번역가 요시카와 나기는 어느 날 한국문학 전문출판사 쿠온의 김승복 대표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토지』의 번역을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요시카와는 2014년 처음 일본어식 완곡한 표현을 사용해 김 대표에게 거절의 뜻을 전했다고 기억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요시카와 나기와 시미즈 치사코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에서 한국문학은 잘 팔리지 않는다는 게 일본 출판계의 일반적인 인식이었습니다. 더구나 쿠온 같은 작은 신생 출판사가 무려 20권이나 되는 『토지』를 완역해 출간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먼저 판권을 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김 대표의 요청만 존재했으니까요. 귀찮은 일에 10년 정도의 시간이 구속되지 않을까 생각돼 거절했지요.”

 

몇 개월 뒤, 요시카와는 다시 김 대표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김 대표는 확실한 답변을 못 받았다며 재차 토지 번역을 요청했다. 그는 김 대표가 우회적인 일본어 거절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김 대표의 집요한 부탁에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시카와는 이때 요청을 승낙하면서도 스무 권에 이르는 방대한 『토지』를 혼자서 다 번역할 수는 없으니 반드시 다른 사람과 공동 번역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번역하는 오랜 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봄기운이 완연하던 2015년 3월, 도쿄 신주구의 한 소극장에서 시미즈 치사코는 요시카와와 쿠온의 김 대표와 함께 연극을 관람했다. 한국문학을 번역하고 싶었던 시미즈는 연극 관람 이후 이들과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박경리의 『토지』 번역 이야기를 하게 됐다고, 그는 기억했다.

 

“김 대표가 요시카와와 만나서 함께 연극이나 보자고 전화를 해왔습니다. 특별히 유명한 연극은 아니었고 그냥 편하게 만나서 함께 놀자는 분위기로 만났지요. 연극을 보고 나서 밥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토지』 번역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일본어로 번역 출간된 박경리의 ‘토지’. 쿠온출판사 제공

요시카와와 시미즈 두 사람은 번역을 시작하면서, 줄거리와 내용을 머릿속으로 그려놓기 위해 한국에서 이미 방영된 드라마 『토지』를 구해서 함께 보기도 했다. 아울러 번역 중간 중간에는 하동 평사리를 비롯해 토지의 주요 무대를 다녀오는 한편, 『토지』의 후반부 무대가 되는 만주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우스리스크 등의 답사도 다녀왔다.

 

무려 9년 이상이 소요된 『토지』 완역은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왜 이렇게 어려운 일에 도전하려고 했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와 눈물도 여러 번. 오랜 시간 번역으로 건강이 나빠지기도 했다. 시미즈의 이야기다.

 

“20권에 달하는 토지 번역 작업은 그야말로 마라톤 풀코스 도전과 같았습니다. 왜 이렇게 어려운 일에 도전하려고 했을까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번역에 몰입해 번역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는 마치 달리기 선수처럼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지요. 2015년 번역에 착수했으니, 무려 9년 동안 『토지』와 함께 살아온 셈입니다. 그 사이 저도 아홉 살을 더 먹었지요. 초반에 비해서는 후반에는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는 것을 느껴져서 힘들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끝까지 달려온 제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어요.”

 

요시카와 나기와 시미즈 치사코 두 일본인 번역가의 노력으로 박경리의 『토지』 일본어판 전 20권이 착수 10년 만에 완역돼 일본 출판사 쿠온에서 완간됐다. 『토지』 전권이 해외에서 완역 출간된 것은 일본이 처음이다.

 

박경리의 『토지』는 경남 하동의 대지주 최참판댁의 딸 최서희가 집안을 일으키는 과정을 중심으로 무려 700명이나 등장해 조선 말기인 1897년부터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1945년 광복까지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담은 대하소설이다.

 

두 번역가는 어떻게 『토지』의 일본어 완역에 나서게 되었을까. 10년 가까이 걸린 완역 기간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까. 이들의 번역 역정은 어디로 향해 갈까. 요시카와와 시미즈 두 번역가를 19일 경남 통영 거북선호텔에서 만났다. 이들은 마침 쿠온 출판사와 일본 독자 등 30여명과 함께 방한해 이날 통영 박경리문학관과 묘소를 찾아 일본어판 『토지』를 헌정하고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시리즈 가운데 몇 권이 번역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이 걸렸는지.

 

요시카와=“아무래도 1권이 가장 시간이 오래 걸렸다. 첫 권 번역은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다. 첫 권의 배경과 내용이 19세기 말 조선 농촌이었는데, 관한 정보도 너무나 적었다. 역주를 많이 달았다. 첫 권에서 작성한 주석을 이후에도 활용할 수 있었고, 인물들이 사용하는 사투리에도 점점 익숙해져 점차 수월해졌다.”

 

시미즈=“저 역시 처음 번역한 책이었다. 이후 조금씩 번역 시간이 줄어갔다. 아마 책의 내용과 시대가 점점 현대와 가까워져 이해하기 쉬워진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공동 번역이어서 통일성 유지가 관건이었을 텐데.

 

요시키와=“처음에는 편집자와 함께 자주 모여서 이야기했다. 700명의 등장인물 이름이나 지명, 관직 등의 표기를 통일하기 위해 메모나 노트를 만들고 인터넷 클라우드에 풀더를 만들어서 공유했다.”

 

시미즈=“요시카와가 제1권을 먼저 번역해 나간 뒤 ‘이렇게 번역했으니 이렇게 해달라’고 하는 방식으로 인명이나 지명, 고유명사를 공유하고 통일해 갔다.”

 

―소설 속의 방언이나 사투리는 결국 포기했다고 했는데.

 

요시카와=“아예 처음부터 포기하기로 했다. 방언이나 사투리를 번역한다는 게 원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핵심 인물인 소희나 길상은 사투리를 쓰지 않더라.(그것을 보완한 다른 장치가 있었는지) 방언보다는 인물의 계급이나 환경 같은 것으로 해서 문체가 달라진다.”

 

―번역자로서 『토지』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요시카와=“무엇보다 인물들이 살아있다. 인물의 성격이 고전적이지 않다. 나이가 들고 환경이 바뀌면서 바뀌어 가기도 하지만, 수많은 인물들이 살아 있다.”

 

시미즈=“우리가 미처 배우지 못했던 그 시대 역사를 이야기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게 좋았다. 역사에 관심이 생겨서 요시카와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스리스크, 연추 등도 둘러보기도 했다.(이때 요시카와는 ‘연추의 독립운동 자료도 많지 않아서 번역이 어려웠다’고 거들었다) 그 동안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만 보았는데, 『토지』의 무대가 한반도는 물론, 일본, 만주, 중국, 러시아까지 펼쳐져 동아시아까지 시야를 넓힐 수 있게 된 것도 매력적이었다.”

 

요시카와 나기

―일본의 대하소설 또는 역사소설과 차이가 있는지.

 

요시카와=“저는 시바 료타료의 역사소설을 읽은 적이 없다. 한국 사람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야기를 담은 『대망』을 많이 읽었다고 하는데, 역시 읽어본 적이 없다. 일본 역사소설은 대체로 실제 인물이 주인공으로, 역사서술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반면 박경리 선생의 『토지』는 역사를 그리는 게 아니라 인간을 그린 소설이다. 저는 이것이 더 좋다.”

 

시미즈는 이와 관련, 출판기념회 인사말에서 인제의 박인환문학관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줬다. “그때 한 분이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과연 일본 독자들이 『토지』를 읽고 식민지배 하에 있던 한국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요. 그때 저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적어도 이 스무 권짜리 대하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수탈과 억압을 당한 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하고 싶고 이해하고자 할 것이라고. 박경리 선생이 책속에 생생하게 그려낸 700명의 삶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요.”

 

요시카와 나기(吉川凪)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인하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한국근대문학을 공부하고 정지용 시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 『경성의 다다, 동경의 다다』를 펴냈고, 다니카와 슌타로와 신경림이 함께 쓴 시집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집 『사과에 대한 고집』 등을 번역 출간했다.

 

1968년 오사카 인근 와카야먀에서 태어난 시미즈 치사코(清水知佐子)는 오사카외대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뒤, 요미우리신문에서 15년간 문화부 기자로 근무했다. 현재는 작가로 활동하며 한국문학을 번역 중이다.

 

―어떻게 한국문학 번역의 길에 들어선 것인가.

 

요시카와=“저는 한국문학에서 시를 전공했는데, 전공을 살리는 가장 가까운 직업이었다. 작고하신 신경림 시인의 제자였고, 신 시인이 방일해 다니구치 슌타로 시인과 시낭송회를 할 때 사회를 보기도 했다.”

 

시미즈=“저는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뒤 15년 정도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 기자 생활 당이 한국어 능력을 살려 취재를 했으면 한국을 더 많이 알 수 있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결국 기자직을 그만 둔 뒤 번역을 하면서 아쉬움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침 2014년 쿠온이 주관한 파주출판단지 북 투어에 참여하면서 김 대표에게 한국문학을 번역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연결이 됐다.”

 

―그 동안 어떤 책들을 번역해 온 것인지.

 

요시카와=“한국시 번역은 수월한 것도 있고 어려운 것도 있지만, 시보다는 산문이 조금 더 수월한 측면이 있다. (김혜순 시인의 시집을 번역했는데) 정말 어렵더라. 한번은 김 시인과 일본 작가가 대담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통역을 했다. 김 시인이 상징적인 말씀을 많이 해서 힘들었다(웃음).”

 

시미즈=“처음에는 조선의 여성들에 대한 논문집 번역에 참여했고, 이후 김 대표가 주도하는 번역에 공역자로 참여하곤 했다.”

 

―일본 내 한국문학 번역 현황은 어떤가.

 

요시카와=“요즘 일본에서 한국문학을 번역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진 것 같다. 예전에는 한국문학과 관련해 번역할 것이 있으면 저에게 많이 왔는데, 요즘은 번역하려는 사람이 많아졌다. 지금 쿠온 온라인스쿨에서 한국문학 번역을 가르치고 있다. 참가자들은 한국인도 있지만, 일본 사람도 많다.”

 

―다음 번역 계획은.

 

요시카와=“제가 쓰는 게 있어서 그것 먼저 해야 한다.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한하운 시인에 대한 글을 준비하고 있다. 번역에 관해선 아직 계획이 없다. 시집을 번역하라는 요청은 있지만⋯.”

 

시미즈=“저도 지금은 뭘 번역할까 고민 중이다.”

 

시미즈 치사코

―하루 일상이나 번역 루틴은 어떤가.

 

요시카와=“저는 일찍 일어나서 작업을 시작한다. 겨울에는 해뜨기 전부터 일할 때도 있고. 저녁이 되면 일하지 않고 산책한다. 번역을 맡게 되면 하루 7시간쯤 번역한다. 건강을 위해서 짐에 가서 가볍게 운동을 한다.”

 

시미즈=“저는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나는 저녁형 인간이다. 저는 요시카와처럼 빨리 번역하지 못해 처음에는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었다. 『토지』를 번역할 때에는 하루 12시간씩 번역했다. 최근에는 그렇게 못하게 됐지만. 나중에는 오른쪽 어깨가 올라가지 못했고, 다음엔 왼쪽 어깨가 올라가지 않더라. 요시카와가 마사지 선생을 소개해줬다(웃음). 지금은 실내 자전거타기와 기계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최근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요시카와=“발표 당일 일본 마이니치신문에서 김혜순 시인이 수상할지 모른다고 해서 번역자로서 집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김 시인의 시집은 일본에 한 권밖에 번역이 없고 어렵기도 하지만, 한강의 책은 여러 권이 번역돼 비교적 많이 읽혔다. 한강의 책 『작별하지 않는다』로 서평을 쓰기도 했는데, 조금 어렵지만 문장이 아름다웠다. 한강의 소설은 조금 어두운 것 같다. 유머가 있었으면⋯.”

 

시미즈=“그날 밤 8시7분 쯤 단톡방에서 쿠온 담당자가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았다고 알려왔다. 쿠온에서 김혜순 시인이나 황석영 작가, 한강 작가의 책이 번역 출간해 대기하고 있었는데, 한강 작가가 받은 것이다. 김 시인이나 황 작가에 대한 기대감은 약간 있었지만, 한강 작가가 받을 것이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웃음).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를 읽었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중간까지 읽었다. 『소년이 온다』의 경우 마음이 아파서 주중에 전철에서 읽으면 안된다고 말이 있더라. 평일에 읽으면 다음날 영향이 있다고(웃음). 그래서 저도 주말에 집에서 읽었다. 말 그대로였던 것 같다.”

 

이날 출판기념회에 모인 한국과 일본 100여명의 청중들은 번역가 요시카와 나기의 인사말에 1분마다 한 번씩 웃었다. 그의 인사말 마지막 이야기는 웃음 끝에 긴 울림이 돼, 호텔 앞 통영 앞바다로 퍼져가고 있었다. 잔잔한 듯, 격렬하게.

 

“번역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읽을 수 있게 하는 작업이기는 하지만, 번역은 최고의 독서의 길잡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번역 작업이 없었다면, 한국의 최고 걸작이라고 불리는 대하소설 『토지』를 이렇게까지 깊이 읽을 기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귀중한 독서 경험을 안겨주신 박경리 선생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통영=글∙사진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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