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에서 만난 팬들을 모두 기억하는 세계적 톱스타 가수 ‘에디’, 요리와 청소 등 집안일에 능한 ‘로비’, 갓난아기도 잘 돌봐주는 ‘스티븐’은 모두 인공지능(AI) 로봇이다. 지난 7∼10일 서울 강서구 마곡동 LG아트센터 시그니처홀에서 공연된 연극 ‘이야기와 전설’에 등장한 로봇들로 생김새는 물론 언행마저 인간을 똑 닮았지만 위협적이지 않고 친근하다. 극 중에서 성장통을 겪는 10대 청소년들과 함께하며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거나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에디의 경우 오랫동안 투병 중인 아이(기욤)에게서 사랑 고백에 이어 “결혼하고 싶다”는 말까지 듣는다. 물론 인간의 필요에 따라 중고 거래 매물이나 폐기처분 신세에 처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야기와 전설’은 가까운 미래 AI 로봇이 일반화한 세상에서 그들과 삶을 공유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11개 이야기로 묶은 작품이다. 프랑스 스타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조엘 폼므라(61)가 직접 한국에 처음 선보이는 연극이다. 폼므라는 1990년 극단(루이 브루이야르) 창단 후 동화를 기반으로 한 3부작 ‘빨간 모자’, ‘피노키오’, ‘신데렐라’ 등 수많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며 프랑스 최고 권위의 공연예술상인 ‘몰리에르상’을 9차례나 수상했다. ‘이야기와 전설’도 2020년 현지 초연 후 몰리에르상 최우수작품상, 극작상, 연출상, 효과상 4개 부문 후보에 오른 바 있다.
폼므라는 한국 초연을 앞두고 “인간을 똑같이 닮은 로봇들이 우리 주변, 가족 안에 들어와 사는 세상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며 “인간과 사물의 경계에 있는 로봇들을 통해 우리 스스로 ‘인간성이란 무엇일까’ 고민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소개했다. 그가 아무리 큰 극장이라도 관객을 500명 이내로 제한한 이유다. 8일 공연 종료 후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 참석한 가랑스 조연출은 “인물들의 내밀함을 굉장히 드러내고 일상의 장면도 많이 보여주는 연극인 만큼 관객 모두가 최상의 조건에서 감상하고 작품 의미를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30대 여성 배우 8명이 질풍노도의 청소년과 인간형 로봇 역할을 자연스레 소화하며 이야기에 설득력을 더한다. 로봇 에디 역을 맡은 안젤리크는 “(폼므라) 연출이 ‘즉흥적으로 해보자’며 배우들과 함께 만든 작품이라 배우들이 사전에 청소년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와 로봇 특성 등 관련 자료 조사와 공부를 엄청나게 했다”고 했다.
모든 배역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에디가 부르는 프랑스 유명 샹송 가수 달리다(Dalida·1933∼1987)의 노래 등 음악은 귀를 즐겁게 하고, 단출하지만 세련된 무대 연출도 돋보인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