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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시인은 적막이라는 짐승을 기다리는 고독한 사냥꾼”

입력 : 2024-12-03 21:08:14 수정 : 2024-12-03 21: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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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번째 시집 ‘몇차례 바람 …’ 출간한 천양희

生의 찬란 그린 ‘비를 보는 죄’
청춘 노래한 ‘푸른 봄의 기록’
많은 이 공감할 61편 담아

불화 속 헤매던 나의 詩
친화의 세계로 발 내디뎌

詩歷 59년… “사유 조금 넓어져”

단풍이 풍경으로 솟구치던 어느 가을, 소나무와 기암절벽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다운 추월산에 갔다. 이때 산은 온통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고, 산으로 간 그의 몸과 마음 역시 단풍이 돼 물들고 있었다. 보름달에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높아 보이는 보리암과, 그 보리암 정상에서 내려다본 푸르디푸른 담양호.

시름마저 펴주는 풍광과, 가슴속까지 태울 것 같은 단풍과, 푸르디푸른 담양호의 곡선을 몸과 마음에 담고 보리암 정상에서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멋진 단풍이 천천히 비에 젖어갔다. 문뜩 어떤 감정이 피어올랐다.

 

시력 59년의 중견 시인 천양희가 열 번째 신작시집을 들고 돌아왔다. 이번 시집에는 존재의 근원적 고독과 슬픔을 깊은 사유와 아름다운 언어로 조탁한 시편이 가득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저렇게 아름다운 단풍조차도 비를 맞는구나. 단풍 자신이 비를 맞고 싶어서 맞는 것도 아닐 텐데. 단풍을 적시는 저 비 역시 내리고 싶어서 내린 것도 아닐 텐데….

단풍과 비를 더 느끼고 싶어서, 시인 천양희는 준비한 우비를 입지 않은 채 그냥 내려갔다. 걸어오는 동안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피어올랐다. 젊을 때부터 비 맞는 것을 좋아해 웬만큼 오는 비가 아니면 우산 없이 그냥 나갔지. 힘든 일도 겪고 세상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고 된 뒤에는 비를 맞고 걸어가는 자신이 보였고. 상처 없는 사람들은 햇빛 속을 잘만 걸어가는데 나는 왜 언제나 비 오는 길일까, 나는 왜 이렇게 젖으며 살아야 하나, 라고 원망하는 자신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가 그치자, 다시 햇빛이 쫙 났다. 하늘은 더 맑아졌고, 풍경은 더 깊어졌다. 이때 문뜩 더 큰 것이 보이는 게 아닌가. 그의 생각이 바뀌었다.


아, 인생이라는 것도 비 오는 날도 있으면 햇빛을 비추는 날도 있기 마련이구나. 나는 왜 한 번도 햇빛을 생각하지 않고 비만 생각했단 말인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 피부 마디마디에서 분출하는 어떤 감정, 주체할 수 없는 감동. 이때의 정황과, 감정과, 마음을 서둘러 적었다. 내가 비를 맞지 않았다면, 어떤 햇빛이 오리라는 찬란도 꿈꾸지 못했겠구나. 울음과 웃음이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닌 같은 의미이고, 어둠이나 빛이 서로 다른 게 아닌 모두 같은 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메모를 보면서 당시의 정황과 심정을 떠올리며 한 편의 시를 써내려갔다.

“비 오다 그칠 때/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을 본 것 같고/ 빗소리는 자기 비평을 쓰는 것 같다// 보는 것의 최고는 자신을 없애고 보는 것// 이런 찬란이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간단할까// 때때로 비는 오고 세상은 젖겠지만/ 젖은 세계를 몇 번이나 더 눈에 담을 수 있을까// 보는 법을 배우다 다시 본다/ 보고 또 보아도/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세상은 짓궂은 것이다”(‘비를 보는 죄’ 부문)

“삶의 고독을 눈부신 서정의 언어로 승화”하며 시의 거리를 오래 지켜온 천양희 시인이 산에서 비가 그친 뒤에 만난 찬란의 순간을 노래한 시편 ‘비를 보는 죄’를 비롯해 61편의 시를 묶은 신작시집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창비)를 들고 돌아왔다. 그의 열 번째 신작 시집. 시집에는 존재의 근원적 고독과 슬픔을 깊은 사유와 아름다운 언어로 조탁한, “길이보다 깊이를 생각”(‘발자취’)하는 시편이 가득하다.

 

시인 천양희가 맞닥뜨린 존재의 고독과 슬픔은 무엇일까. 불가피한 존재의 고독과 슬픔을 어떻게 사유하고 노래했을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천 시인을 지난달 14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식당에서 만났다.

“병이 나를 들이받은 것과 한 인간을 만난 것” 같은 인생에서 만난 “대형사고”를 반추하거나(‘모를 것이다’), 늘 삶을 뒤척이면서 걸어가는 모습(‘뒤척이다’)도 엿볼 수 있다. “허공을 향해/ 몸을 던지는 거미처럼/ 쓰러진 고목 위에 앉아/ 지저귀는 붉은가슴울새처럼/ 울부짖음으로 위험을/ 경고하는 울음원숭이처럼/ 바람 볼 때마다 으악/ 소리를 내는 으악새처럼/ 불에 타면서 꽝꽝/ 소리를 내는 꽝꽝나무처럼// 남은 할 말이 있기라도 한 듯/ 나는 평생을/ 천천히 서둘렀다”(‘뒤척이다’ 전문)

 

―이 시는 어떻게 나왔는지.

“10여 년 전쯤 몸이 안 좋아 수술을 받았다. 무척 아팠다. 아프면 시를 못 쓰는데 어떡하나 싶어서 병상에서 뒤척였다. 시를 안 쓰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며 속으로 낫게 해달라고 빌기도 했다. 잠을 못 자고 뒤척이다 보니 아침이었다. 그때 병상에서 심정을 메모해 뒀다가 나중에 추슬러 쓴 것이다.”

“소유보다는 자유”를, “모범보다는 모험”을 추구할 수 있는 청춘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편도 있다. “소유보다는 자유가/ 의심보다는 호기심이/ 모범보다는 모험이 최고봉일 때// 그때가 젊을 때이다// 젊다는 것은/ 가끔 길을 잃거나/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좋은 것이다//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며 꿈을 이룬다고/ 누가 말했더라// 몸 전체로 살고/ 마음 전부로 도전하면 된다/ 청춘의 기록에/ 두 번은 없다”(‘푸른 봄의 기록’ 전문)

―청춘의 노래가 눈부시다.

“대학 시절, 아버지가 일주일에 한 번씩 붓글씨로 편지를 써서 보내주셨다. 한 번은 편지에 ‘청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세월을 허송하지 말아라, 청춘부재래 세월막허송’이라고 써서 보내 주셨다. 그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돈은 잃어버리면 다시 벌 수 있지만 청춘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다시 청춘으로 돌아간다면) 요즘에는 배낭 메고 여행을 많이 가는 것 같다. 배낭을 메고 아니면 배를 타고 세계를 한번 돌아다보고 싶다.”

 

―10번째 시집인데,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이전 시집이 불화의 세계에서 헤맸다면, 시집 ‘마음의 수수밭’(1994년)부터 조금씩 친화의 세계로 나아갔고, 이번 시집은 독자들 사이에서 꼭 내가 한 말 같다, 나를 두고 한 말 같다, 같은 반응이 나올 정도로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시의 지평을 열지 않았나 생각한다. 넓이에 대해 사유도 조금 넓어진 것 같고.”

1942년 부산에서 태어난 천양희는 대학 3학년 재학 중이던 1965년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시를 ‘현대문학’에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마음의 수수밭’, ‘너무 많은 입’,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새벽에 생각하다’ 등을 발표했다.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공초문학상, 박두진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인 천양희의 하루 일과는 산책으로 시작한다. 오전 6시에 일어나서 삼십 분 뒤 집을 나서서 두 시간 정도 집 부근의 공원을 산책하고 운동한다. 물론 산책하다가도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메모한다. 산책은 생각의 산파.

아침은 선식처럼 간단하게 한다. 낮에는 대체로 책을 읽거나 메모를 정리한다. 점심을 먹고 한 시간 정도 오수를 취한 뒤, 우두커니 있기도 하고, 잡생각을 하기도 하며, 고개를 팍 숙이고 있는 베란다의 화초와 이야기를 하기도.

…네가 지금 겸손하고 싶은 것이냐. 아니면 기운이 떨어진 것이냐, 물을 주지 않아서 네가 지금 화가 나기도 하겠지만 왜 그렇게 참지 못하는 것이냐.

보통 새벽 1시나 2시에 잔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난다. 산문은 주로 낮에 쓰고, 시는 조용한 밤에 쓴다. 시를 쓸 때는 집중적으로 쓴다. 손을 깨끗하게 씻는다. 이어서 낮은 상에 앉아서 하심을 갖고 쓴다. 백지 위에 부드럽게 잘 나가는 두꺼운 볼펜으로….

펜 끝에서 마음 끝까지, 머리에서 마음으로. 시라는 것은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고독에 바치는 것. 시인이라는 것은 적막이라는 무서운 짐승을 기다리는 고독한 사냥꾼. 더구나 다 잃어버리고 마지막 시 하나 남지 않았던가. 시인의 정신은 더욱 돌올해진다.

“폭풍이 몰아쳐도 눈바람 맞아도/ 홀로 푸르게 서 있는 소나무 같은// 붉은 꽃을 피우고도 질 때는/ 모가지째 툭, 떨어지는 동백 같은// 불굴의 정신으로// 자신에게 스스로 유배를 내리고/ 황무지를 찾아가는 사람”(‘시인’ 부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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