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文學)이란 언어를 표현 매체로 하는 예술 및 그 작품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의 한 분야다. 필자가 여기서 예술로서의 문학(文學)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문학(文學)도 있지만, 문학(聞學)이라는 말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한자의 의미를 그대로 풀면, 문학(聞學)이란 ‘들어서 배움’을 말한다. 문학(聞學)의 반대되는 개념은 설교(說敎), 즉 자신의 말을 통해 남을 가르치는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설(說), 즉 말이 넘쳐나고 있다. 말이 너무 많아 어지러운 세상, 즉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상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정점이 정치권이고 국회다. 정치인은 일단 말을 잘해야 한다고 하더니, 역시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인가 보다. 대화와 협력보다는 설(說)쳐야 주목받는다. 국회와 정치권에서 설(說)치며 쏟아내는 막말들은 종종 극단적인 표현으로 이어져 국민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말을 많이 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주목받고 싶어 하고 주도적 입장이 되고 싶은 심리의 발로일 것이다.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은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입 하나 잘못 놀려 낭패를 보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대화의 기본은 경청이다. 경청(傾聽)이란 귀를 기울여서 듣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본인의 말만 하려고 한다. 소통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말하기가 아니라 ‘들음’이다. 말을 해서 배우는 것보다 들어서 배우는 것이 더 유익하다. 특히 국가를 이끄는 대통령은 ‘문학(聞學)’, 즉 경청의 리더십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듣는 측면보다 말하는 측면이 더 강했다는 평가다. 대통령으로서 국민을 설득하고 설명하여 가르치려다 보니 말이 많아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정치인이 사실 말이 많다. 배우고자 하는 것보다 가르치려는 태도가 앞서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왕적 리더십의 일면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내가 제왕이니 백성을 계몽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의식이 잠재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국민은 제왕이 일깨워야 할 조선의 백성이 아니다. 지혜롭고 현명하고 똑똑하다.
말하여 가르치려 하기보다 들어서 배우고자 하는 ‘문학(聞學)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들어야 배운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지혜는 듣는 데서 오고 후회는 말하는 데서 온다’라는 말이 있다. 말 한 번 잘못하여 패가망신하거나 입신양명의 길이 막힌 사람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이 있었다. 일단 들어야 사정과 상황이 파악되고 그래야 진단과 처방이 나오지 않겠는가? 듣지 않고 본인의 말만 하려다 보니 소통과 협치가 될 리 없고 불통령(不通領)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여야 정치 원로들도 윤 대통령의 지난 집권기를 돌아보니 소통능력이 가장 취약했다고 평가했다. 국민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경청의 리더십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바로 ‘문학(聞學)하는 대통령’이 되어 들어서 배우는 소통의 리더십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좋다’라는 책 제목처럼 국민의 말을 잘 들어주는 대통령이 될 때, 현재의 국정 난맥상을 타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문학(聞學)하는 대통령’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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