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놈들 때문에 나라가 뒤집어지면, 이건 우리 군의 수치고 치욕입니다.” 12.12 군사반란을 소재로 지난해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에서 쿠데타군에 맞서 육군본부 벙커를 끝까지 지켰던 진압군측 김준엽 헌병감의 대사 중 하나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서울의 봄’은 젊은 층의 기억에서 잊혀지던 계엄령과 쿠데타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계기가 됐다.
그로부터 1년 뒤, ‘서울의 봄’은 우리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였다.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계엄군의 국회 진입은 무력을 동원한 헌정질서 전복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다시금 실감하게 했다.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난 지 45년만에 등장한 계엄은 영화 ‘서울의 봄’ 대사처럼 장병들에게 수치를 안겼다.
“군 조직에 환멸을 느낀다”며 전역을 고민하는 직업군인들도 있다. 권력이 정치적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려 시도한 ‘힘의 정치’에 군이 뿌리째 흔들리는 모양새다.
◆명령 추종은 군인의 덕목이 아니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국회의 권한을 보장한 헌법과 계엄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행위였다. 비상계엄 발령 요건부터 법률에 맞지 않았다. 형식은 비상계엄이지만, 기존 권력이 더 큰 권력을 얻고자 무력을 앞세우는 친위쿠데타라는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다.
일각에선 “명령이 내려오면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군인의 자세”라고 주장한다. 군의 단결을 위해선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이 지난 7일 국회 정보위에 출석해 비상계엄 선포 당시 방첩사 활동에 대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위기 상황에 군인들은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강하게 생각한다”고 말한 것에서도 이같은 인식이 엿보인다.
이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민주주의 국가 군대에서 맹목적 복종을 강조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군인은 ‘제복 입은 민주 시민’이다. 독일 연방군은 이를 ‘자유로운 인격체, 책임 의식을 지닌 시민, 전투준비태세가 완비된 군인’으로 정의한다.
명령이 있을 때 군인들은 무조건 복종하지 않고, 최종 결정은 본인이 판단한다. 비민주적이고 비합법적인 명령은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복 입은 민주 시민’이 개념이다.
군인은 입대하기 전에 시민이고, 시민은 각각 고유한 인격과 주체적 인식을 지닌 국민이다.
시민과 국민은 다양한 신념과 삶의 방식, 의견 등을 가질 수 있다.
한국군 장병도 개성과 다양성을 지닌 사회의 일부로서 민간 분야처럼 상호 이해와 갈등이 함께 존재한다. 따라서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한국군은 다양한 세대, 신념, 문화, 출신 간 이해와 갈등이 내부에 있다.
이들을 통솔해서 임무를 수행하려면, 모든 장병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합법성과 보편 타당성을 갖춰야 한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당시 특전사령부와 방첩사령부를 비롯해 일선 부대에서 장병들이 소극적으로 움직이거나 반발했던 사례가 잇따랐다.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의 지시와 박안수 전 계엄사령관의 포고령이 헌법과 계엄법을 위반한 처사였고, 보편 타당성을 갖추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일선 장병과 요원 중 평시 상황에서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납득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입대 전 학교 등에서 헌법과 법치주의, 민주주의 시민의식을 배웠던 젊은 군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들의 인식이 12.3 비상계엄 사태로 수렁에 빠질 뻔한 군을 지킨 진정한 주역이다.
위기 상황에서도 정당하지 않다면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좌익 혐의자를 무차별 체포하는 예비검속이 곳곳에서 이뤄졌다. 당시 제주도 성산포경찰서 문형순 서장은 이들에 대한 군의 총살 명령서에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履行)’이라고 거부, 295명을 구했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이같은 원칙을 김 전 장관 등이 무너뜨린 사건이다. “군인은 까라면 깐다”는 구시대적 사고방식, 섣부른 확증편향, 욕심 등이 낳은 참사다.
군 소식통은 “계엄 직후 일련의 과정이 위법이라는 걸 사령관들이 정말 몰랐겠냐. 다 알았을 것”이라며 “‘성공하면 꽃길’이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수십년간 독일 육군사관학교에 유학생을 보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김 전 장관 등 수뇌부가 ‘제복 입은 민주 시민’이란 독일 연방군의 개념을 외면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군사정권의 폐해라는 지적도 있다. 육사 38기인 김 전 장관은 2학년 때 12.12 군사반란을 겪었다. 1982년 임관 당시엔 제5공화국 시절이었다. 법과 원칙보다 상명하복을 강조하던 군사정권의 위세가 정점에 달해있던 시기였다.
◆진정한 위기가 찾아오고 있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6시간 천하’로 끝났지만, 군이 직면한 위기는 이제 시작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윤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이 계엄에 동원한 부대는 유사시 김정은 국무위원장 등 북한 수뇌부를 타격할 참수부대나 공수여단 등 한국군을 대표하는 최정예부대다.
대북 침투를 담당하는 특수전부대인 만큼 부대원 하나하나를 양성해서 각종 특수전을 치를 수 있도록 하기까지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
그런 부대들이 비상계엄에 갑작스레 투입되면서, 장병들은 극심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
계엄 당시 국회 본청에 진입했던 707 특임단을 이끌었던 김현태 단장(대령)은 9일 기자회견에서 “부대원들이 많이 아파하고 괴로워한다. 부대원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아빠의 눈치를 보고 있다”며 “부대원들은 김 전 장관에게 이용당한 피해자”라고 토로했다.
실제로 계엄령에 동원됐던 707특임단 등에선 “군에 환멸을 느낀다” “내년엔 전역해야겠다”는 반응이 곳곳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기도 많이 떨어졌다.
“전역하고 호주군 입대를 알아봐야겠다”는 말까지 들려오는 상황이다. 호주 정부는 2040년까지 10만 명의 군 출신 외국인을 호주군으로 받아들인다는 계획이다. 실제로 여러 명의 장교가 일과 삶의 균형을 포함한 더 나은 처우에 이끌려 호주군에 입대했다.
군 소식통은 “내년엔 (특전사 등에서) 전역하는 인원이 좀 나올 것 같다”고 전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 예비역 사이에선 육사의 내년도 신입생 중 다음 달 시작할 가입교 기간에 응할 인원이 예년보다 줄어들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비상계엄을 주도한 인물들이 육사 출신이고, 이로 인해 세간에서 육사에 대한 인식이 악화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조짐은 군의 핵심 인재 유입을 막고 유출 위험을 높이며, 투자비용과 군사력 손실을 초래한다.
군의 중추를 이루는 장교를 양성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든다. 육군사관학교 장교 1인당 양성비용은 2억3800만 원, 707특임단 1인당 양성비는 10억7400만 원에 달한다. 거액을 들여 육성한 인재가 군을 떠나면, 비용 측면에서의 손실은 매우 크다.
전투력 약화는 더욱 심각한 문제다. 혹독한 훈련 등을 거쳐 특수전과 대테러전 등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707특임대원과 특전사 대원들은 한국형 3축 체계 중 하나인 대량응징보복(KMPR)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이 군을 떠난다면,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을 확보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발생할 전력 공백은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은 계엄에 동원됐던 장병에게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있다.
김 전 장관은 윤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선포를 건의했고, 포고령 발표와 계엄군의 국회·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진입 등도 지휘한 것으로 지목되고 있다. 계엄을 주도한 인물인 셈이다.
하지만 김 전 장관은 지난 8일 긴급체포될 때까지 계엄군으로 투입되어 자괴감에 시달리는 장병들에게 사과의 뜻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동안 그의 텔레그램은 쉼없이 돌아갔다. 검찰에 긴급체포될 때까지 마지막 접속 시간이 계속 바뀌었다. 휴대전화도 5일간 3번이나 바꿨다. 짧은 시간 동안 바쁘게 움직였던 셈이다.
그럴 시간이 있었다면 계엄에 동원된 장병들을 위로하는 것이 한때 군 수뇌부였던 사람이 해야 할 행동이었다는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다.
한국군 최고의 부대인 707특임단과 특전사를 뿌리부터 뒤흔들고, 장병의 사기와 자긍심을 땅에 떨어뜨렸으며,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짓밟은 결과를 초래한 장본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군대에서 상급자가 내린 명령을 부하가 반발 없이 수용하도록 하려면, 헌법의 가치를 병영에서 구현한다는 의식에 근거해야 한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이같은 원리를 완전히 무시한 채 상급자의 명령에 따른 결과다.
45년만의 계엄 사태에 직면한 군을 추스르려면,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 대장부터 이병에 이르기까지 ‘제복 입은 민주 시민’ 개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장병 정훈교육을 민주주의와 법치, 자유, 인권 등의 원리를 배우는 형태로 바꾸고, 전투력을 높이는 훈련을 강화해야 한다.
국방정신전력원과 국방대학교 등 군 교육기관에선 민주주의 역사와 정치 원리를 장교와 장군들이 학습할 수 있도록 교재와 교육 프로그램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건전한 시민의식과 높은 전투력을 겸비한 군인을 양성하는 교육훈련체계를 한국군에 확립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비상계엄 사태와 12.12 군사반란 45주년을 맞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피해는 애꿎은 초급 간부와 병사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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