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라는 말에 울림 있어
트라우마·기쁨·사랑 등 다양
긍정적 변화 부르는 말 되길
이사크 바벨 ‘나의 첫 번째 거위’(‘기병대’에 수록, 김홍중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내가 아는 범위에서 작가 이사크 바벨을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제임스 셜터인 듯하다. 이 지면에서는 그의 단편 중 ‘20분’이란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다. 내가 이사크 바벨의 단편들을 다시 읽게 된 동기도 제임스 셜터의 산문집을 읽고 나서였는데, 미국 문예지 ‘파리리뷰’와 한 인터뷰가 특히 기억에 남았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단편 작가가 누구냐는 질문에 그는 이사크 바벨이라고 대답했다. 문체, 구성, 권위, 이 위대함의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어서. 거기에 ‘인생 역정’이라는 요소가 추가되어 더 마음을 끈다고. 지금의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이사크 바벨은 군사정권에 의해 실제로 어려운 시대를 살았고 죽음 또한 그러했다.
안경을 쓰고 글 쓰는 일을 좋아하는 ‘나’는 법학 석사이며 자신의 원고가 가득 든 트렁크를 소중히 여기는 군인이다. 어느 날 제6사단장이 그를 호출했다. 사단장은 체구도 커서 그를 압도하고 군복 가슴에 번쩍거리며 달린 훈장들은 ‘마치 하늘을 갈라놓는 군기’처럼 보였다. 사단장이 그에게 방금 본부대장이 작성했다는 명령서를 내밀었다. 신임하는 연대를 이끌고 가서 적군들을 섬멸(殲滅)하며 진격하라고 쓰인. 사단장이 말했다. “명령 수행이라!”
그는 보급관과 함께 마을로 갔다. 그의 눈에 “죽어가는 태양이 붉은 숨결을 하늘로 내뱉고” 있는 듯 느껴지는 거리였다. 오두막집으로 그를 데리고 간 보급관이 미안하다는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매우 탁월한 사람이라도 여기서는 정신이 나가버리게 된다고. 거기에 있는 다른 병사들인 카자크들에게 보급관은 그가 명령에 따라 여기에 왔다는 걸 강조했다. 사실 같은 민족이면서 서로를 적으로 봐야만 하는 내전의 시기였다. 다른 병사들이 그의 트렁크부터 집어 던졌다. 그는 흩어진 원고를 모으곤 마당 한쪽으로 가 트렁크를 베고 누웠다. 좋아하는 문장들을 읽으려고 했지만, 그들이 발을 밟거나 놀려대는 통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고독과 배고픔이 몰려와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두막의 안주인처럼 보이는 노파에게 가서 먹을 것을 달라고 말했다. 노파의 대답이 불쾌하게 들려서 그는 주먹으로 노파의 가슴을 밀쳤다. 얼결에 몸을 돌려보니 마당에 군도(軍刀)가 보였다. 그리고 “단정해 보이는 거위가 마당을 뒤뚱거리며 돌아다니면서 한가로이 깃털을 다듬고” 있는 것도. 그는 거위에게 다가갔고 손에 든 군도로 그 일을 했다. 노파가 앞치마로 거위를 싸서 부엌으로 가자 그에게서 돌연한 폭력적 행동을 본 카자크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모래로 군도를 닦은 뒤 문밖으로 나갔다가 “괴로워하면서” 다시 돌아왔다.
그날 밤 그는 건초 창고에서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고 한 여인을 보았는데 아까 저녁이 올 때 느낀 어머니 같았다. 그의 뜨거운 이마를 어루만져주던 것 같던. 이제 그의 가슴, “살육으로 붉게 물든 가슴은 힘겹게 버티며 뛰고 있었다”. 이것이 이 짧은 단편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리고 독자는 소설의 맨 앞장으로 가, 이 연마되고 다듬어진 제목을 다시 물끄러미 보게 된다. ‘나의 첫 번째 거위’. 문득 깨닫게 된다. 그는 아까 마당에 누워 있을 때까지만 해도 아직 폭력을 써본 적도 무언가의 생명을 앗아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거위’들을, 얼마나 더 많은 생명을 파괴하게 될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 그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도.
좋은 제목은 독자에게 문학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요즘 같은 어려운 날들을 보내며 이 제목을 떠올려보곤 한다. 조금 두렵고 막막해진다. 이렇게 바꾸어봐도 그렇다. 나의 첫 번째 트라우마, 나의 첫 번째 후회, 나의 첫 번째 슬픔 등등. 좀 좋은 쪽으로, 긍정적으로 바꾸어보자고 마음을 돌려본다. 나의 첫 번째 집, 나의 첫 번째 친구, 나의 첫 번째 이웃, 나의 첫 번째 사랑, 나의 첫 번째 꿈. 여기까지 떠올리자 마음이 한결 나아지는 듯하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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