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그리스 미술 하면 신전 건축이나 조각상을 떠올린다. 고대 문화의 꽃을 피운 그리스 시대에 회화는 없었을까? 문헌상으로는 이집트 미술이 지중해를 건너 그리스에 영향을 미쳤고, 그리스 화가들은 이집트의 양식적 특징을 넘어서 혁신적인 발전을 이루었다고 전해 온다. 하지만 조각에 비해서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고, 도자기 위의 그림으로 그 성과가 알려질 뿐이다.
이집트 회화는 왕의 분묘 속의 벽화가 대표적인데, 신과 같은 존재였던 왕이 죽은 후에도 자신들을 보살펴 주길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려 했다. 묘사한 사건과 인물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하려 했고, 이를 위해서 이미지의 형태를 명확하고 완전하게 나타내려 했다. 사물이나 인물의 특징적인 형태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각도에서 표현했으며, 머리는 옆에서 본 모습, 눈이나 어깨와 가슴은 앞에서 본 모습, 팔과 다리는 옆에서 본 모습으로 혼합해서 나타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런 형태 묘사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관찰로 파악한 모습을 덧붙여 형태들을 점차 다듬어 나갔다. 이런 변화가 ‘전사의 작별’ 도자기에서 나타난다. 물과 포도주를 섞을 때나 포도주를 저장할 때 사용했던 스탐노스라는 항아리인데, 그 안에 전투에 나가는 사람과 작별하는 장면을 담았다.
가운데의 병사 모습을 보면, 이집트 양식처럼 얼굴은 옆모습, 어깨는 앞에서 본 모습으로 그리고, 한쪽 발도 옆에서 본 모습으로 그렸다. 하지만 병사의 다른 한쪽 발은 앞에서 본 모습으로 되어 있어, 관찰을 통해서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왼쪽의 남자와 악수하는 손이나 개의 다리와 병사의 다리를 중첩시켜 표현한 것을 보면, 입체감과 거리감도 나타내려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그리스 사람들은 이집트 회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집트 피라미드의 제작에서 보인 기하학적 규칙성을 신전과 인체 조각에 적용해서 비례와 균형을 갖춘 그리스 건축과 조각이 탄생했고, 본격적인 서양 미술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박일호 이화여대 명예교수·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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