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감기로 고생하는 딸아이가 종일 밥술도 뜨는 둥 마는 둥 기운이 없더니 저녁 늦게 문득 빵이 먹고 싶다고 했다. 어떤 빵인가 물었더니 도넛이란다. 안에는 팥이 들어 있고 겉에는 설탕이 뿌려져 있는, 그러니까 구(球) 형태의 찹쌀 도넛을 말하는 것이었다. 알았어. 금방 사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쳤다. 엄마, 다른 빵은 안 돼. 꼭 그걸로 사야 해. 열 때문에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아이가 당부할 때만 해도 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찹쌀 도넛이라면 빵집마다 당연히 구비해놓는 품목이 아닌가.
그러나 웬걸, 가장 먼저 들른 동네 빵집에는 그것이 없었다. 빵집 주인이 미안해하며 오늘은 일손이 많이 달리는 날이라 도넛을 만들지 못했다고 했다. 두 번째로 들른 프랜차이즈 빵집에서도 허탕을 쳤다. 도넛이 세 종류나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안에 팥이 든 제품만 품절이었다. 세 번째로 간 곳은 골목 안쪽에 있는 테이크아웃 도넛 전문점이었다. 금일 휴업. 다시 큰길로 나오는데 허탈함 때문인지 몸이 으슬으슬했다. 바람도 없는데 대기가 건드리면 쨍 소리가 날 듯 차가운 것이 이러다가 나까지 감기 걸리겠다 싶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네 번째 빵집은 걸어서 십 분쯤 걸리는 곳에 있었다. 걸어갈까 추운데 버스를 탈까 망설이며 횡단보도 앞에서 보행 신호를 기다리는데 불현듯 맞은편 행인들의 손에 빨강과 초록이 선명한 케이크 상자가 들린 것이 눈에 띄었다. 순간 느닷없이 김종길의 시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온 붉은 산수유 열매,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아이는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볼을 부비는, 성탄제의 밤….
물론 열을 내려주고 면역력을 높여주며 항염 작용을 하는 산수유 열매가 아니라 비만과 당뇨 및 심혈관 질환 발병률을 높이는 도넛을 구하러 다니는 내 상황을 그 시 속에 대입시키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같은 성탄제의 밤, 시 속에서 아팠던 아이는 서른 살이 되어 그 옛날 젊었던 아버지와 산수유를 떠올리는데 내 딸아이는 훗날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 기억이나 할까. 어서 도넛을 사 들고 돌아가 아이에게 ‘성탄제(聖誕祭)’를 읊어주어야겠다고, 그 처연하게 아름다운 시로 아이가 오늘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다음 빵집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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