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 기간보다 재임 후 더 화려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사는 대통령’으로 불린 지미 카터 미국 제39대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별세했다. 향년 100세로 미국 역사상 최장수 대통령으로도 기록된다.
카터 전 대통령은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 치료를 받았지만, 암세포가 간과 뇌까지 퍼지면서 2월18일 추가 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돌봄을 받는다고 밝힌 바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설립해 인권 운동 등을 추진한 카터재단은 이날 성명을 통해 카터 대통령이 자택에서 가족들이 있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카터 전 대통령의 아들인 칩 카터는 성명에서 “제 부친은 저뿐만 아니라 평화, 인권, 이타적 사랑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웅이셨다”면서 “저희 형제와 자매, 저는 이런 공통의 신념을 통해 전 세계와 부친을 공유했다. 우리는 이런 공통의 신념에 따라 살면서 부친을 기리는 여러분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1924년 10월1일 조지아주 플레인스에서 태어난 카터 전 대통령은 해군 대위로 복무한 뒤 아버지의 땅콩 농장을 경영했다. 이후 정계에 입문, 민주당 소속으로 조지아주 상원의원(1963∼1967년)과 조지아주 주지사(1971∼1975)를 지냈다. 1976년 대선에서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을 꺾고 대통령에 당선돼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백악관을 지켰다.
카터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기간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역대 최저 지지율 기록을 이어갔다. 1973년 1차 석유파동으로 미국은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져 있었고, 카터 전 대통령 취임 이듬해인 1978년 2차 석유파동이 시작되면서 미국 경제가 휘청거렸다. 카터 전 대통령이 취임한 1977년 1월 미국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5.2%였지만 인플레이션이 장기간 이어지면서 1980년 3월에는 소비자물가상승률이 14.8%를 기록했다. 실업률 역시 재임 초기 6%에서 7.5%로 급증했다.
1979년 3월28일에는 미국 북동부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섬에서 원자력 발전사고로 주민 10만명이 대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카터 전 대통령은 사고 나흘 뒤인 4월1일 현장을 방문해 “원전 신규 건설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여론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1979년 11월4일 시작된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은 카터 전 대통령 재선 실패에 결정타가 됐다. 이란 과격파 학생 시위대가 주이란 미국 대사관에 난입, 점거해 1981년 1월 20일까지 무려 444일 동안 외교관을 포함한 미국인 52명을 인질로 억류했다. 카터 정부는 이란과 단교하고 금수조치를 단행하며 즉각 보복 조치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인질을 구출하려던 미군 장병 8명이 사망하면서 카터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폭락했다.
1980년 11월 치러진 대선에서 공화당 소속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선거인단을 489명 확보했지만 카터 전 대통령은 선거인단 49명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50개 주 가운데는 44개 주가 레이건 전 대통령을 선택했다. 사상 최대의 압도적 패배이자 1932년 이후 재선에 실패한 첫 번째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워싱턴포스트(WP)는 “백악관에서 카터의 재직 기간은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을 포함한 경제 침체 시기와 일치했다”면서 “이란 대사관에 억류된 52명의 인질은 카터가 새로 선출된 공화당 레이건에게 대통령직을 넘기는 날까지 석방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 퇴임 이후 1982년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비영리재단인 카터센터를 설립하고 전 세계의 평화와 인권, 공중 보건 증진을 목표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94년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한 1차 북핵 위기 당시 미국 대통령 출신으로는 최초로 북한을 전격 방문, 김일성 주석과의 담판을 통해 북·미 대화 재개와 비핵화를 위한 단계적 계획을 논의하며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외에도 베네수엘라, 인도네시아, 쿠바, 아이티, 보스니아 등 국제 분쟁 지역에서 평화적 중재안을 제시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 운동을 통해 14개국에서 약 4300채의 집을 지원했다. 카터 전 대통령의 이런 공로는 2002년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취임 직후부터 인권 외교를 내걸었던 카터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정부를 독재로 규정하고 인권 문제 등을 이유로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했다. 대선 공약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내걸었던 카터 전 대통령은 취임 후 1978년부터 1982년까지 3단계에 걸쳐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9년 카터 전 대통령을 공식 초청해 성대한 환영 행사 등을 개최하며 카터 전 대통령을 설득했고, 카터 전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 방침을 철회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94년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한 이후 2010년과 2011년까지 모두 3차례 방북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생전에 북한을 다시 방문해 북한 문제 해결에 물꼬를 트고 싶다는 의사를 수차례 밝힌 바 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46년 7월7일 로슬린 카터와 결혼해 4명의 자녀를 뒀다. 2021년 결혼 75주년을 맞아 미국 대통령 역사상 가장 긴 결혼 생활을 한 것으로도 기록됐다. 카터 전 대통령과 77년 해로한 로슬린 여사는 지난해 11월 향년 9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생전 워싱턴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고향 플레인스에 있는 집 앞에 묻히고 싶다고 2006년 미 의회방송 등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워싱턴과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국장으로 공개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라고 카터센터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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