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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거부한 그는 마루방에 갇혔다 [김동환의 김기자와 만납시다]

입력 : 2025-01-04 12:00:00 수정 : 2025-01-02 21:3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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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전 그날 목놓아 운 한규설

조약 동의 강요하는 이토 히로부미에
韓 참정대신 “칙명이라도 복종할 수 없다”
결국 감금… 그새 ‘五賊’들 조약 체결
일제에 끝까지 저항… 재야 칩거생활
“을사오적에 맞선 인물… 잊지 말아야”

1905년 11월17일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일본 전권대사와 대한제국 대신들이 모였다. 이토는 ‘일본국 정부는 외무성을 통해 한국의 외국 관계와 사무를 감독 지휘한다’로 시작하는 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한국 ‘보호국화’를 거론해 온 일본은 러일전쟁 종결 후 조약을 밀어붙였다.

 

을사늑약에 강하게 반대했던 대한제국 참정대신 한규설에 관한 자료가 서울 관악구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본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학교는 한규설의 아들 한양호가 1926년에 세운 경성여자상업학교를 전신으로 한다. 김동환 기자

일본군에 둘러싸인 대신들은 조약 동의 여부 질문을 받았고, 이튿날 새벽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날인으로 대한제국 외교권을 강탈당한 ‘을사늑약(乙巳勒約·늑약: 억지로 맺은 조약)’이 체결됐다. 탁지부대신 민영기와 함께 늑약에 반대하다 중명전 마루방에 갇혔던 참정대신(參政大臣) 한규설(韓圭卨·1848∼1930)은 이 사실을 알고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2025년은 을사늑약 체결 120년이 되는 해다. ‘을사오적(乙巳五賊)’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박제순, 농상부대신 권중현과 달리 조약 체결에 반대했던 한규설은 상대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역사로 박제된 을사오적으로 늑약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아 반대한 인물의 조명 필요성도 일부 제기된다.

 

◆재구성한 심정… ‘칙명’이어도 복종할 수 없다

다음은 한규설에 관한 기록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아 국가유산청 자료 등을 토대로 늑약 후 그의 심정을 일인칭에서 재구성한 내용이다.

궁중으로 들어가서 어전회의(御前會議)에 참석해 폐하께 일본 공사와 만났던 자초지종을 아뢰며, ‘도장은 찍을 수 없다’고 엎드려 간곡히 말씀드렸다. 박제순은 도장을 생명과 교환할 결심을 했노라고 명확히 말했다.

 

이토를 비롯한 군인 등의 궁중 등장에 형세가 매우 절박했다. 이완용은 ‘거절만 한다고 일이 무사한 형세가 아니니 차라리 조문 수정을 요구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고, 권중현과 이지용도 그렇게 하자는 의견을 말해 회의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나는 ‘절대 불가하니 만일 칙명(勅命)이더라도 복종할 수 없다’고 맞섰다.

공사관 통역관 시오카와가 와서 내 옷자락을 잡아끌어 중명전의 한 마루방으로 가니, 이토가 들어와서 하는 말이 역시 도장을 찍도록 하라고 했다. ‘그럴 도리가 있냐’며 ‘불가하다’고 하자 이토가 슬그머니 나갔고 사관들이 마루방 문을 지킨 채 나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이렇게 밤새 승강이를 벌이는 동안 다른 대신들이 모인 곳에서 어떤 사태가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다음 날 오전 한 시 반쯤 되어 사관이 물러갔기에 나가보니 외부대신이 조약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고 한다.

청천벽력이었다. 정신을 잃고 앙천통곡(仰天痛哭)을 했다. 하지만 운들 무슨 소용인가. 믿었던 박제순이 무안한 얼굴로 나오기에 ‘이 사람, 연못에 집어넣는다는 도장을 어찌했느냐’고 호령했지만 모두 쓸데없었다.

 

◆‘직무 다하지 못했다’ 비난도

을사늑약 체결로 하룻밤 사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이듬해 2월 일본은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했다. 이토가 초대 통감으로 취임한 가운데, 통감부는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 면에서까지도 우리 정부에 직접 명령·집행하게 하는 권한을 가졌다.

우리 민족은 여러 형태의 저항으로 맞섰다. 장지연(張志淵)이 1906년 11월20일자 ‘황성신문’에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발표로 침략성을 규탄했고, 고종은 1907년 이준·이상설·이위종을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했다.

 

서울 중구 덕수궁 중명전 내부에 재현된 을사늑약 체결 장면. 뉴시스

본관이 청주인 한규설의 호는 ‘강석(江石)’이며 한성판윤(漢城判尹·지금의 서울시장) 등을 역임했다. 참정대신으로 내각에 참여했고 을사늑약 체결 후 파직됐다. 재야에서 칩거생활을 했으며,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1920년 조선교육회를 창립해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로 발전시켰다.

다만, 공훈전자사료관 자료 등에 따르면 참정대신 직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와 늑약 체결에 분노한 일부의 자결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 등에서 한규설을 겨냥한 비난도 당시 있었다. 그의 아들 한양호가 1926년에 세운 경성여자상업학교를 전신으로 하는 서울 관악구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본관에는 늑약 체결 후의 자료를 살펴볼 수 있는 작은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교육계 한 관계자는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떠올리는 이가 많지만, 을사늑약을 강하게 반대했던 인물들도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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