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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거장들이 사랑한 그시절 서울을 담다

입력 : 2025-01-04 06:00:00 수정 : 2025-01-02 20: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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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나도향 추가된 개정증보판
국내 대표작가 12인 발자취 좇아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 속 종로 등
서울 내 문학공간 구석구석 톺아봐
과거 도시 풍경 등 살펴보는 재미

서울 문학 기행/ 방민호/ 북다/ 1만8800원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 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이 같은 인상적인 문장을 시작으로 현진건의 1924년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은 1920년대 초반 서울의 모습을 배경으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를 끌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김 첨지의 고단하고 비극적인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수작이다.

한국 현대문학사에 깊은 영감을 남긴 열두 작가의 삶과 작품 이야기를 서울의 공간 속에서 찾아나선 책 ‘서울 문학 기행’의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사진은 책에서 다룬 윤동주(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박태원, 임화, 박인환, 박완서, 이호철 작가. 세계일보 자료사진

작품에서 인력거꾼 김 첨지는 동소문 안 집을 나와서 동소문 전차 정거장에서 한동네 마님을 태운 뒤 혜화동 전차 정거장으로 향하고, 다시 교원으로 보이는 사태를 태워서 관우를 숭상해 세운 북묘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동광학교를 거쳐서, 남대문 정거장까지 갔다가, 다시 인사동을 지나서, 조우한 친구 치삼과 함께 선술집을 들른 뒤,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여정을 보여준다.

인력거꾼 김 첨지가 살던 열악한 초가집 행랑채에서 월세를 살고 있던 동소문은 당시 어떤 모습이었을까. 동소문의 풍경을 이해할 수 있는 기사가 1921년 5월18일자 ‘동아일보’에 실려 있다. “동소문 내 청계천과 훈련원 사이에 있는 조산에는 날부터 집 없는 빈민들이 움을 묻고 기어들고 기어나가며 비와 바람을 막고 지내던 곳으로 작년까지도 그 움의 호수가 오십여 호나 되고 인구가 일백십여 명에 이르렀었는데….”

방민호/ 북다/ 1만8800원

아울러 김 첨지의 행로를 따라가다 보면 1920년대 당시 서울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마님, 학교 교원, 학생, 기생인지 여학생인지 모를 젊은 여성, 큰 짐가방을 든 사내 등등. 김 첨지와 인력거를 매개로 하나의 도시 풍경과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형상을 보여준다.

자하문 너머 부암동에 살면서 ‘운수 좋은 날’을 비롯해 ‘빈처’, ‘술 권하는 사회’ 등 주옥같은 작품을 썼던 언론인 출신 현진건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자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게재하는 데 연루돼 신문사를 떠나야 했고, 이후 역사 소설 ‘흑치상지’, ‘무영탑’, ‘선화공주’ 등을 발표했다.

“구보는 집을 나와 천변 길을 광교로 향하여 걸어가며, 어머니에게 단 한마디 ‘네’ 하고 대답 못했던 것을 뉘우쳐 본다. 하기야 중문을 여닫으며 구보는 ‘네’ 소리를 목구멍까지 내어 보았던 것이나, 중문과 안방과의 거리는 제법 큰소리를 요구하였고, 그리고 공교롭게 활짝 열린 대문 앞을, 때마침 세 명의 여학생이 웃고 떠들며 지나갔다. 그렇더라도 대답은 역시 하여야만 하였었다고, 구보는 어머니의 외로워할 때의 표정을 눈앞에 그려본다.”

스물여섯 살에 직업도 딱히 없고, 버는 돈도 시원찮으며, 장가도 가지 않은 구보. 한 손엔 단장을 짚고 다른 한 손엔 공책을 든 그는 낮 12시쯤 다옥정의 집을 나서 종로 네거리, 화신백화점, 조선은행, 경성부청, 대한문, 태평통, 남대문, 경성역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등 새벽 2시까지 경성 시내 곳곳을 배회한다. 물속에 뜬 꽃가루처럼, 목적지 없는 산책자처럼. ‘경성 보이’ 박태원은 1938년 단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통해 1930년대 남촌과 북촌으로 구획된 이중도시 경성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일장기’를 지우고 누추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직시하려 했던 현진건의 동소문과 자하문 너머 부암동을 비롯해,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이상과 박태원의 종로와 청계천, 비극적 주인공이었던 프롤레타리아 시인 임화의 종로 네거리와 종로 6가, 윤동주의 누상동 하숙집, 지금은 길이 돼버린 김수영 시인의 구수동 옛 집터, 손창섭이 일본에서 돌아와 어렵게 정착해 소설의 길을 가던 흑석동, 박완서의 소설 ‘나목’ 주인공 이경이 미군 피엑스에서 일하며 사랑을 나누던 명동.

서울은 우리나라 문화가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도시로, 공간 곳곳에 축적된 시간은 오늘의 시간 및 이야기들과 닿아 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인 저자는 책 ‘서울 문학 기행’에서 이상, 윤동주, 박태원, 박인환, 김수영, 임화, 손창섭, 이호철, 박완서 등 열두 작가의 삶과 작품 이야기를 서울의 공간 속에서 풍성하게 펼쳐놓는다. 현진건과 나도향의 작가와 작품 이야기를 새롭게 추가한 개정 증보판. 그리하여 우리는 책 속에서 서울 곳곳의 문학적 공간을 탐색하면서 시대정신과 삶의 지향을 모색하는 우리 시대 구보를 만날지도.

“구보는 벗이, 그럼 또 내일 만납시다. 그렇게 말하였어도, 거의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이제 나는 생활을 가지리라. 생활을 가지리라. 내게는 한 개의 생활을, 어머니에게는 편안한 잠을… 평안히 가 주무시오. 벗이 또 한 번 말했다. 구보는 비로소 그를 돌아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하였다. 내일 밤에 또 만납시다. 그러나 구보는 잠깐 주저하고, 내일, 내일부터, 나 집에 있겠소, 창작하겠소….”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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