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 6 · 25와 자유민주주의
절체절명 속 빛난 헌신
美, 개전 직후부터 파병 등 지원 결정
유엔 사상 최초로 유엔군사령부 설립
초기 열세 딛고 한때 압록강까지 진격
국가 정체성 확립 계기
전쟁 중 채택한 유엔결의 지금도 유효
한·미동맹 근간 된 상호방위조약 체결
민주주의 발전·경제 성장 원동력 얻어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으로 한반도는 광복을 맞았다. 광복의 기쁨에 가득 찬 한반도는 새 나라를 세울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북에는 소련군, 남에는 미군이 진주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에 맞서 함께 싸웠던 미국과 소련은 대립하기 시작했고, 38도선 남쪽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갖춘 대한민국이 들어섰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이념·사상·영토전(戰)이었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낙동강까지 밀려났던 대한민국은 미국과 유엔군 파병에 힘입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킬 수 있었다. 6·25전쟁은 좌우 이념 대립에 휩싸였던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와 연대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역사적 분수령이 됐다. 100만명에 달하는 민간인 사망·부상·실종자, 군인 사상자와 실종자 62만명, 유엔군 사망·실종자 15만명의 값진 희생으로 얻은 대가였다.
◆나라 지킨 숭고한 헌신
1945년 8월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한반도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의 결정에 따라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됐다. 치열한 대립 끝에 1948년 8월과 9월 남쪽과 북쪽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수립됐다. 1000여년 동안 통일국가를 유지해 왔던 한민족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국면이었다. 양측은 한민족의 통일국가 수립을 둘러싸고 갈등의 길로 들어섰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군사원조를 확보해 전쟁을 준비하는 등 무력통일의 야심을 키웠고, 급기야 1950년 6월 25일 38도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한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맞서 치열하게 항전했지만,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미국과 유엔이 나섰다. 미국은 북한군의 남침 개시 다음 날인 6월 26일부터 한국에 대한 지원을 결정하고 공군 등을 투입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38도선 이북으로 북한군이 퇴각할 것을 요구했다. 북한이 이를 무시하자 한국을 지원하는 결의안을 28일 채택했다.
북한군에 밀려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 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삼았다. 낙동강 전선에선 9월 중순까지 혈전이 거듭됐다. 특히 대구로 통하는 요충지인 경북 칠곡군 다부동에서는 55일간 격전이 벌어졌다. 전투가 벌어지면 부대원의 30~40%가 사라졌고, 이들을 신병으로 대체하는 일이 지속됐다.
당시 다부동을 지켰던 국군 1사단을 지휘한 고 백선엽 장군은 회고록 ‘군과 나’에서 “전선의 상황이 너무 급해 학도병 등으로 신병을 받아도 이들을 제대로 훈련시킬 여유가 없었다”며 “3~4시간 동안 기본적인 소총 사격 훈련과 수류탄 투척 요령만 습득한 뒤 곧바로 전선에 투입됐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고지를 10여 차례나 뺏고 빼앗길 정도로 치열한 전투에서 국군 1사단은 장병들의 희생을 딛고 대구를 지켜냈다.
낙동강 방어에 집중하며 역습의 기회를 노리던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고 전세를 반전시켰다.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한 후 28일 서울을 수복했고, 낙동강 전선에서도 공세에 나섰다. 인천상륙작전 이튿날인 9월 16일 유엔군은 낙동강의 적 포위망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대구-김천-대전-수원 축선을 따라 공격하면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군과의 연결을 통해 양동 작전을 전개했다.
전쟁 발발 97일 만에 사실상 실지를 되찾고 전쟁 전 현상을 회복한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했다. 10월 1일 한국군 3사단이 38선을 넘었으며, 이에 유엔군도 북진 작전에 들어갔다. 국군과 유엔군은 청천강 이북지역까지 진격 통일을 눈앞에 뒀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은 다시 뒤집혔다. 청천장을 넘어 압록강 가까이 북쪽 깊숙이 진입한 유엔군은 중공군의 기만·유인전술로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세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로 철수에 철수를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이듬해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줬다. 이후 전쟁 수행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중공군을 상대로 국군과 유엔군은 몇 차례의 공세 작전을 펼쳐 서울 이북 38선 지역까지 또다시 밀고 올라갔지만, 전선은 그곳에서 고착됐다. 팽팽한 정전 협상과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동시에 계속되며 소모전 양상을 보이던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긴 분단 역사의 서막을 열었다.
◆극적인 유엔군 참전 결의와 의미
유엔군 파병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내는 전환점이 됐다. 참전 결의 과정은 극적이었다. 당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화민국(대만 장제스 정부) 5개 상임이사국과 거부권이 없는 6개 비상임이사국으로 구성됐다. 상임이사국 가운데 한 국가만이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결의안은 부결된다. 북한의 남침 배후 역할을 했던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유엔군 참전·파병·지원은 이뤄질 수 없었다.
하지만 소련은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이 기존의 대만 정부를 대신해 유엔 대표권을 행사할 것을 요구하며 1950년 1월부터 안보리 회의 참석을 거부했다.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유엔 안보리는 유엔 헌장 39조에 의거해 참전을 결정했다. 뒤늦게 소련이 안보리에 복귀해 6·25전쟁 관련 결의에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주요 파병 결정은 끝난 상태였고 추가적 결의는 유엔 총회에서 이뤄졌다.
특히 1950년 7월 7일 채택된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84호는 유엔 회원국들이 제공하는 군사력 및 기타 지원을 미국 주도 통합사령부가 통제하고 미국 정부가 통합사령관을 임명하도록 했다. 이 결의는 통합사령부가 유엔기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유엔군사령부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오영달 충남대 정외과 교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엔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 유엔군사령부의 존속은 대한민국 안전 보장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북한 등은 유엔사 해체를 끊임없이 요구해왔지만, 18개 회원국이 속해 있는 유엔사는 한반도에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 채택한 유엔 결의들은 지금도 유효하다. 한반도 유사시 새로운 결의를 채택하지 않고도 한국을 돕기 위해 유엔 회원국들이 참전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평가다.
한·미동맹의 법적 근간을 이루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국의 안보를 더욱 튼튼히 하는 계기가 됐다. 정전협정 직후인 1953년 10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체결돼 1954년 11월 18일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전쟁 이전과 달리 동맹 관계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군 전력도 대폭 강화됐다. 대한민국 정부와 군, 국민들은 국제 사회와의 연대를 통해 최대 국난인 6·25 전쟁을 이겨냈다. 그리고 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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