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13일 전원위원회에 윤석열 대통령의 방어권 보장과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소추 철회 등을 골자로 한 ‘계엄 선포로 야기된 국가의 위기 극복 대책권고의 건’을 상정한 데 대해 인권위 내부와 전직 고위직을 중심으로 규탄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직원 내부망에 안건에 대한 비판글이 속속 올라오는 가운데, 전직 인권위원·사무총장 등 15명은 10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고 안창호 인권위원장을 향해 안건 폐기를 촉구했다.
10일 세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인권위 내부 익명게시판에는 “인권위가 이렇게 무너지는군요, 피눈물이 납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이 글의 조회수는 이날 오전 기준 530회를 넘었다. 한 직원은 해당 안건 제출을 주도한 김용원 상임위원과 안창호 위원장 등을 겨냥한 듯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라는 소설책 제목을 인용하기도 했다.
인권위 직원 A씨는 이날 세계일보에 “권리를 침해받고 차별받은 약자와 시민사회단체들의 노력으로 일궈온 인권위의 모습이 망가지는 것 같아서 자괴감이 들고 마음이 괴롭다”고 토로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 인권위지부는 전날 오후 성명을 내고 안건 폐기를 요구했다. 이들은 “(해당 안건을 공동발의한 인권위원들은) 독립기구인 인권위를 내란 동조 기구로 전락시키려는 시도를 꾀하고 있다”며 “이는 수사기관의 체포와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의 위기에 놓인 윤석열을 구하려는 내란동조 세력의 정치적 술수이자 획책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인권위 전직 위원·사무총장들은 10일 오후 2시 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안건 상정이 “내란 수괴와 그 공범자들을 비호하는 어용적 결정”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 자리에선 전공노 인권위지부 소속 직원 30여명도 “윤석열 위기 극복 방안 즉각 폐기하라!”고 적힌 손피켓을 들고 “인권위 독립성 침해 안건상정 즉각 철회하라” 등 구호를 함께 외쳤다.
최영애 전 인권위원장은 “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에 맞서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 인권위”라며 “계엄 선포도 기가 막히지만, 인권위의 존재를 부정하는 안건을 발의한 위원과 결재한 위원장도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이를 바로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 민주주의와 인권이 위협받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권위 비상임위원을 지낸 서미화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인권 수호의 최후 보루인 인권위가 내란동조 세력의 거수기 역할을 하려 한다”며 “독립기구로서 명예와 지조는커녕 끝도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오점을 남기지 말고 즉각 안건을 철회하라”고 말했다.
박경서 전 인권위원도 “위헌적 비상계엄과 포고령에 대해 입도 뻥끗하지 않던 인권위가 내란 행위자들을 옹호하겠다니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며 “안 위원장과 일부 인권위원들의 반인권적 행태에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들은 또 전직 인권위원장·위원 등 29명 명의로 배포한 기자회견문을 통해 “인권위의 파행을 보면서도, 인권위가 자정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안건을 제출한 인권위원들은 당장 인권위를 떠나라. 내란범을 비호하는 행위를 멈춰라”고 촉구했다.
앞서 안 위원장은 전날 김용원·한석훈·김종민·이한별·강정혜 인권위원이 공동발의한 ‘(긴급)계엄 선포로 야기된 국가적 위기 극복 대책 권고의 건’을 13일 전원위 상정안에 결재했다. 이 안건에는 ‘국회의장은 국무총리 한덕수에 대한 탄핵소추를 철회해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하도록 할 것’ ‘헌법재판소장은 국무총리 한덕수에 대한 탄핵심판 사건을 다른 탄핵심판 사건들에 앞서 신속하게 심리하고 결정할 것’ ‘대통령 윤석열에 대한 탄핵심판 사건에서 피청구인의 방어권을 철저히 보장할 것’ ‘180일의 (탄핵)심판 기간에 얽매이지 말 것’ 등 내용이 포함됐다.
안건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에는 윤 대통령과 변호인단의 논리를 답습하는 듯한 내용도 담겼다. 이들은 “계엄 선포는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고유 권한”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계엄이 선포되고 지속된 짧은 시간 동안 사람이 큰 부상을 입거나 사망한 사례가 없고 기물 파손 정도도 경미해 체포되거나 구금된 사람도 없다”며 “계엄 선포에 관해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내란죄를 적용해 체포·구속영장을 발부하는 일은 크게 잘못된 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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