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 시즌1에 처음 참여했을 때는 이렇게 크게 되리라는 예감이 전혀 없었죠. ‘되게 실험적 드라마를 만드네’라고 생각했어요. 못 보던 형태잖아요. 다 세트에서만 (연기가) 이뤄지고 영화적인 공간에서 똑같은 초록색 옷을 입고 하는 게.”
‘오징어 게임’ 시즌1에 ‘프론트맨’으로 특별출연한 배우 이병헌은 촬영 당시 “‘야, 이거 모 아니면 도 아닐까’” 예상했다. 결과는 아예 윷놀이 규칙이 새로 쓰인 수준이었다. ‘지.아이.조’ ‘레드: 더 레전드’ 등으로 해외 시장을 일찌감치 경험했던 그로서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시즌2에서는 작품을 끌고 가는 주역으로 참여한 그를 8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우리 말로 한국 감독이 만들고 한국 배우들과 함께한 작품으로 이런 사랑을 받는다는 게 감개무량해요. 사실 (과거) 제가 할리우드 작품을 했을 때 이런 반응을 기대했어요. ‘내가 이제 거리를 못 다니겠네’ 했는데 웬걸 거리에 하루 왠종일 서 있어도 못 알아봐요. 그런데 이번에 작품 공개도 전에 홍보를 위해 미국 팬 이벤트에 가봤는데 팬들의 호응이 열광적이었어요. 놀랍고 신기했죠.”
시즌2가 만들어지기로 결정됐을 때 이병헌은 황동혁 감독과 식사 자리를 가졌다. 그는 “감독님도 머릿 속에 아무 것도 없었고 ‘어떻게 쓰지’ 하는 상황이었다”며 “몇개월 후 책(대본)이 나오고 나자 ‘됐다’ 싶었다”고 했다. 그는 “너무 놀랐다”며 “본인도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한지 몇 개월이 안 됐는데 책이 나오고 보니 ‘이 사람 천재구나’ 생각됐다”고 말했다. 그는 앞서 영화 ‘남한산성’을 찍으면서도 수많은 연기 컷 중 미묘한 차이로 더 좋은 연기를 선택하는 황 감독을 보며 ‘저 사람은 귀신처럼 제대로 판단하는 사람이구나’ 했다고 한다.
이병헌은 작품에 들어갈 때면 연기할 인물을 철저히 분석한다. 시즌2를 하면서도 11개월간 황 감독에게 ‘이 사람이 왜 이랬을까’에 대해 끊임없이 물어봤다. 이런 과정 끝에 프론트맨의 인물상이 선명해졌다. 프론트맨이 형사 황인호로 살던 시절에는 평범했으리라 추측했다. 세상을 미워하게 된 건 아픈 아내를 위해 돈을 빌렸다가 비리 경찰로 낙인 찍혀 해고당하면서다.
“이런 인물이 오징어 게임에 참여했는데, 우승자이니 많은 죽음을 봤을 거예요. 이들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쓰레기 같은지 두 눈으로 봤으니 인간과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을 겁니다. 프론트맨에게는 삶과 죽음이 큰 의미가 없어요. 어쩌면 본인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든 10여년을 살아온 사람이라서. 그가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바깥 세상으로 나가기가 두렵고 싫은 마음이 제일 커서라고 해석했어요.”
이 작품에서 그는 프론트맨, 오영일, 황인호라는 세 인물을 오가야 했다. 세 명의 비율을 얼만큼 조합해서 연기할지 고민이었다. 머릿 속이 복잡했다. 두번째 5인6각 게임에서 그는 진심으로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보인다. 이병헌은 “이전에 그런 경험을 했으면 프론트맨의 감정은 일반 사람의 희로애락이 아닐 것이고, 미소조차 짓기 힘든 내면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며 “그런 사람이 천연덕스럽게 웃고 환호하는 척 해야하니 연기하기 힘들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도 일단 찍어보자 했죠. 감독님이 ‘좀더 (감정을) 보여줬으면 좋겠는데요.’ 그래서 더 보여주고 보여주고. ‘그럼 한번 게임을 즐겨볼게요’하고 한 연기가 보기에 가장 재미는 있더라고요. ‘감독님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어쩌면 황인호도 이 순간을 즐기고 있지 않을까요’라고 했어요.”
그는 프론트맨이 성기훈(이정재)의 본명을 실수인 척 말하는 장면에 대해서는 “놀리는 것”이라며 “내 이름도 오영일이라고 얘기하고 팽이를 못 돌려서 시간을 촉박하게 하는 것도 기훈을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7화 기훈의 반란 대목에서는 “기훈이 대의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걸 보며 ‘네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는구나’ 하고 야릇한 미소를 짓는 게 프론트맨의 목적”이라며 “반란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웃기지도 않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즌2에서 이병헌의 연기에는 다들 입모아 호평을 내놓는다. 그는 ‘게임 참가자인 척 연기하는 프론트맨’이라는 겹겹의 연기를 하면서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정확한 표정을 미세한 근육 움직임과 순간의 눈빛으로 보여준다. 이런 연기력의 비결이 뭘까.
“이전에 그런 경험을 한 적 있어요. 영화를 계속 실패하라 때라 극장에서 내 영화를 틀어준다는 자체가 너무 가슴이 터질 것처럼 신나고 기뻤던 어린 시절이었어요. 극장에서 제 연기를 보는 데 (눈 뜨고) 볼 수가 없는 거예요. 누구에게나 뻔히 보여지는 연기 방식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 나름대로는 캐릭터가 가진 상황에 빠져서 내면에 그 감정을 갖고 연기한다고 생각했는데, 얼굴로 표현하는 것이 보여지니까 되게 거북했어요. 영화 ‘달콤한 인생’ 즈음인가 그 전인가, ‘그냥 생각만, 감정만 갖고 하자’ 했죠. 얼굴이 어떻게 비춰질지 생각하지 않고 내가 감정만 가지고 있으면 보는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거다. ‘내가 감정만 가지고 있으면 되는구나’라고 어느 순간부터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는 자신의 연기 노하우로 ‘대본에 충분히 설득되는 것’을 들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어도 몇 군데가 이해가 안 되고 설득력이 부족하면 감독과 결론이 날 때까지 계속 질문하고 대안을 찾으려고 애를 쓴다”고 한다. 그는 “나도 이해 못하고 이 신이 와닿지 않으면 그 신만큼은 가짜로 보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시즌2 공개 후 누리꾼 사이에서는 프론트맨의 서사를 따로 떼낸 스핀오프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병헌은 프론트맨의 프리퀄 제작 가능성에 대해 “황 감독님에게 얘기 좀 해달라”며 “스토리가 좋게만 나온다면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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