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등 韓 청춘 이슈 단편작 9편 수록
내적 갈등 겪는 인물 내면 세밀히 묘사
꾸밈없는 솔직함·담백한 유머 구사 눈길
“청년들, 노력해도 암울한 미래에 체념”
“무엇을 좋아해? 어떤 곳을 가보고 싶은 거야?” 어느 날 친구와 만나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갔던 곳 가운데 좋았던 곳은 어디인지.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는지.
“사실 요즘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그냥 요즘 뜨는 여행지를 찾아갈 뿐이야.” 한참을 이야기하던 친구가 미적지근하게 말했다. 평소 여행을 자주 다니는 친구였는데, 맥이 탁 풀리는 의외의 반응이었다.
아니,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왜 그렇게 열심히 여행을 다닌 거지? 소설가 김지연은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문뜩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맞아,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주위 분위기나 환경 때문에 선택하고 결정하는 건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어떤 인물이 떠올랐다. 선택의 기로에서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아닌 주변의 분위기에 따라서 전형적인 결정을 내리는 사람. 정말 원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어떤 일을 하고, 분위기에 따라서 직업을 선택하며, 크게 원치 않으면서도 결혼을 하는. 그리하여 전형적 삶을 추구했던 여성이 자신의 인생 경로에 비로소 의문을 품기 시작한 비범한 순간을 예리하게 포착한 단편소설 ‘좋아하는 마음 없이’를 지난해 여름 발표했다.
소설은 안지가 남편 현수의 불륜으로 이혼한 지 10년 만에 남편과 불륜을 저질렀던 여성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전형적 삶이 주는 안정감을 추구했던 안지는 연애나 취직, 결혼 등 남들이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모두를 열심히 했지만, 아이가 막 돌을 지난 무렵 바람난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요구받았다. 안지는 여성으로부터 아이 양육비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남편의 사망 보험금 처리를 고민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삶과 사랑을 되짚어보기 시작한다. 남편과 그 여성의 삶과 사랑도.
“생각해보면 이혼해달라고 말할 때도 여자와 남편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산뜻한 방법을 선택했다. 그런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솔직한 사람. 숨기느니 차라리 정면돌파를 선택하는 사람. 그래서 뻔뻔할 수 있는 사람.”(158쪽)
소설가 김지연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를 비롯해 2022년부터 지난해까지 발표한 단편소설을 묶은 두 번째 소설집 ‘조금 망한 사랑’(문학동네)을 펴냈다. 소설집에는 2024년 ‘올해의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반려빚’과 2022년 이효석문학상 우수작으로 선정된 ‘포기’ 등 9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 사랑과 빚, 마음과 노동, 청춘과 재해?. 우리 시대 청년 세대를 관통하는 핵심 이슈와 정서, 감정이 특유의 꾸밈없는 솔직함과 담백한 유머로 펼쳐져 있다.
첫 소설집 ‘마음에 없는 소리’로 일약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 2위에 꼽혔던 젊은 소설가 김지연이 묘파한 우리 시대 청춘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김 작가를 지난해 연말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주인공 안지에게서 요즘 젊은이들의 어떤 모습이 엿보이는데.
“조금 막장드라마 같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남편은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여자를 찾았다며 불륜을 한다. 정말 좋아했는지도 잘 모르면서 결혼했던 안지는 자신과 결혼한 남편이 어떻게 다른 여자가 좋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혼할 수 있을까 하고 약간 의문을 품게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장면을 그리진 못했다. 그래도 인생 여정을 지나면서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살아가게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마지막에 약간 담으려 했다.”
소설집을 여는 작품은 이효석문학상 우수작인 ‘포기’다. 이야기는 ‘나’(미선)가 사촌 호두를 비롯해 많은 이들에게서 돈을 빌렸다가 사라진 전 남친 민재를 호두와 함께 찾아 나서면서 시작된다. 나중에 연락이 닿은 민재는 호두에게 돈을 얼마간 갚아 가지만 다시 사라지고 만다. 소설은 마지막에 민재에 대해 기대하면서도 포기하려는 나의 미묘한 마음을 포착한다.
―이 작품을 통해 독자와 나누고 싶었던 것은.
“화자인 미선이나 사촌 호두가 과연 민재를 포기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두 사람이 끈덕지게 민재를 찾으려 했던 것도 관계에 대한 희망을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기도 했을 것이다. 본인들이 결정을 내려 포기했다기보다는 포기를 당한 것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젊은이들은 어느 세대보다 고학력에 힘겹게 노력하는 이들인데도 뭔가 응답받지 못한다고 느끼거나 안 될 거라는 메시지가 느껴지기에 어느 순간 체념하거나 손을 놓아버리는 일도 있는 것 같다. 마지막 문단을 쓸 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냥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과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하는 복잡한 심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마지막 문단을 썼던 것 같다.”
올해의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반려빚’은 애인에게 빌려준 대출금이 오롯이 자신의 몫이 된 정현의 이야기다. 정현은 전세 사기를 당한 연인 서일을 위해 은행에서 큰돈을 대출받아 빌려주지만, 서일이 헤어진 뒤 연락마저 끊으면서 빚을 떠안게 되는데.
“빚이야말로 정현이 잘 돌보고 보살펴 임종에 이르는 순간까지 지켜봐야 할 그 무엇이었다. 빚 역시 앞으로 수년간은 정현의 옆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정현이 죽었나 살았나 그 누구보다도 두 눈 부릅뜨고 계속 지켜볼 것이다. 빚이야말로 정현의 반려였다.”(79쪽)
―이 소설은 어떻게 나왔는가.
“팬데믹이 소강 국면이던 2021년이 거의 끝날 무렵, 앞으로 살아가면서 내 곁에 남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하고 생각했다. 남은 게 거의 없고 빚밖에 남지 않을까 생각이 들면서 반려빚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올렸다. 반려빚을 제목으로 소설을 쓰기로 생각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빚만 남은 인물, 그래서 빚을 반려로 살아가게 된 사람을 그려보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빚 또한 예전에 반려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남기고 간 것이면 어떨까, 하고 생각이 번져갔다.”
1983년 거제도에서 조선노동자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김지연은 2018년 단편소설 ‘작정기’가 문학동네신인상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장편소설 ‘빨간 모자’, 중편소설 ‘태초의 냄새’, 소설집 ‘마음에 없는 소리’, ‘조금 망한 사랑’ 등을 발표했다. 김만중문학상 신인상, 이효석문학상, 젊은작가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차분하게 들려주었다. 마치 자신의 소설처럼, 낮은 목소리로. 비상계엄 사태가 벌어진 다음 날이라서 계엄 이야기도 조금 나눴는데,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기 위해서 했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얼척없는 비상계엄에 대해선 ‘에라 모르겠다 계엄’이라고 함께 조소하기도 했다. 보통 자정 무렵에 자는 그는 오전 8시쯤 일어난다. 낮에는 문학서적을 출간하는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주로 주말에 글을 쓴다. 급한 마감이 있으면 저녁에 쓰기도 하고. 요즘에는 점점 체력이 쇠하는 느낌도 든다. 예전에는 카페에서 주로 썼지만, 요즘엔 그냥 집에서 글을 쓴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자주 산책을 갔던 소설가 김지연은 요즘에는 주로 뜨개질을 한다. 뜨개질을 하면서 마음 속으로 소설과 인물을 부지런히 굴리고 엮을 것이다. 한 바늘에는 불운과 함께 사는 민재의 슬픔을. 또 한 바늘에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하는 미선의 결의를. 또 다른 한 바늘에는 자신의 불운에 끝내 울어버린 호두의 마음을. 그리고 우리 시대 불우한 청춘들과 그들의 눈물, 눈물을?.
“민재가 말한 평범한 삶이란 불운과 함께하는 삶이었다. 살면서 한두 개의 불운이란 없을 수가 없으니까 그것이야말로 평범한 삶이었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지. 그날 호두가 민재에게 끝없이 전화를 걸다가 연결되지 않자 끝내 울어버리는 것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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