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다. 윤석열정부 들어 뚜렷한 개선 움직임을 보인 한·일 관계는 느닷없는 12·3 비상계엄 사태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양국 정상이 서로 오가며 현안들을 논의하는 ‘셔틀 외교’는 한국 대통령이 국회 탄핵소추로 직무가 정지되며 당분간 불가능해졌다. 대통령을 대신해 권한대행을 맡은 국무총리마저 거대 야당의 탄핵 폭주에 희생되고 부총리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의 국정을 이끄는 비정상적 상황이다. 얼마 전 일본 외무상이 한국을 방문해 우리 조태열 외교부 장관과 양자 회담을 하며 관계 복원에 나섰으나, 국교 정상화 60주년 기념 행사 가운데 여럿이 축소되거나 취소될 것이란 우려가 크다.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양국 관계를 뒤흔든 첫번째 악재는 1974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재일교포 문세광이 쏜 총에 맞아 서거한 사건일 것이다. 문세광이 일본에서 훔친 총을 몰래 숨기고 한국에 입국한 점, 친북 성향의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 문세광의 배후란 점 등을 들어 일본 책임론이 비등했다. 박 대통령은 일본 측에 진심 어린 사죄와 조총련 규제 등을 요구했다. 우리 외교부는 일본 정부가 이를 끝내 거부하면 단교(斷交)하는 방안까지 마련했다. 일본 총리의 특사가 청와대를 방문해 박 대통령에게 총리의 사과가 담긴 서한을 전달하고 조총련 단속 강화 의지를 밝히며 사태는 일단락됐다.
두 번째 악재는 1980년대 들어 불거진 이른바 ‘안보 경협’ 갈등일 것이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일본이 소련(현 러시아), 중공, 북한 등 공산주의 진영의 위협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것은 한국이 저지선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일본이 어떤 식으로든 한국 안보에 기여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며 천문학적 액수의 경제협력 자금 공여를 요구했다. 일본은 ‘안보와 경협을 연계하는 것은 무리’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 양국 간 협상은 결렬 직전까지 가며 2년 가까이 시간을 끌었다. 결국 미국의 설득을 받아들인 일본이 1983년 한국에 그때 돈으로 40억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결정하며 다툼은 마무리됐다.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95년 1월17일 일본 남서부 항구도시 고베(神戶)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1923년 이래 최대 규모의 지진으로 사망자만 6400명이 넘었다. 당시 김영삼(YS) 대통령은 “한국이 일본의 가장 가까운 나라라면 일본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한국이 제일 먼저 돕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YS 지시로 이재춘 당시 외교부 차관보가 500만달러 상당의 긴급 구호품을 조달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직접 피해 지역에 전달했다. YS는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는 폭탄 발언으로 한·일 관계를 긴장시키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양국이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고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돼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올해 국교 정상화 60주년 행사가 양국이 정말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되는 계기로 작용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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