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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세(武器世)…평화로운 일상 한순간 파괴하는 전쟁의 공포·불안

입력 : 2025-02-10 20:33:16 수정 : 2025-02-10 21: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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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날리는 탄피 속 군인들
미키마우스 모양 방독면…
무기 매개로 현대사회 성찰
군사주의 문명 위험성 경고

서울대미술관서 5월4일까지
국내외 작가 120여점 선보여

커다란 K9 자주포의 몸체가 푹신푹신하다. 포신이 바닥까지 흘러내린 채 무력화한 모습이다. 퇴근하는 직장인의 지친 뒷모습처럼 한없이 ‘힘없게’ 보이도록 만들어 놓았다. 작가 허보리가 제작한 ‘부드러운 K9’(515×200×150㎝)이다.  

 

허보리, ‘부드러운 K9’

작가는 남성성을 상징하는 넥타이와 양복, 이불솜, 바늘을 활용해 전쟁과 폭력의 무기를 지었다. 현대 사회의 치열한 경쟁을 은유하기 위해서다. 일상적으로 착용하는 의복이 전투와 폭력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보여준다.

 

허보리가 만든 총과 고폭탄, 수류탄, 전차 등은 실제 전투에서 사용되는 모델들이지만, 의복용 천으로 이루어진 무기들은 공격적인 이미지를 벗어나 말랑말랑한 형태로 변형된다. 그의 작업은 폭력적인 체제에 대한 비판을 넘어 평화와 부드러움을 제시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노영훈, ‘미키’

노영훈은 일상과 전쟁, 평화와 폭력 사이의 긴장감을 탐구한다. 미키마우스 모양의 어린이용 방독면, 장난감처럼 보이는 지뢰와 풍선을 닮은 수뢰 등은 처음엔 유쾌하고 아무런 해가 없을 듯 여겨지지만, 사실 모두 살상을 위한 무기들이다. 작가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과 무기를 결합해 평화로운 일상이 언제든 재난과 폭력으로 급변할 수 있는 불안한 현실을 시각화한다. 전 세계 모든 곳에서 감시와 정찰, 살상이 가능한 시대를 반영하며, 개개인의 삶과 의식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강용석, ‘매향리 풍경’
레지나 호세 갈린도, ‘그림자(La Sombra)’

현대 사회의 최첨단 기술이 하나로 모인 무기를 통해 지금 우리를 성찰하고, ‘예술의 힘’은 곧 ‘무기를 들지 않을 수 있는 힘’이란 것을 일깨우는 전시회가 5월4일까지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미술관(관장 심상용)에서 ‘무기세(武器世)’라는 문패를 내걸고 관람객을 맞는다. 강용석, 강홍구, 권기동, 레지나 호세 갈린도, 밈모, 박진영, 방병상, 이용백, 폴 샴브룸, 하태범 등 국내외 작가 작품 120여점을 선보인다.

 

권기동, ‘부산 USS-Carl Vinson(칼 빈슨)’

‘무기세’는 무기 생산, 방위산업, 전쟁 등 군사 활동과 이를 둘러싼 군사·산업 복합체가 지구 환경과 인류의 미래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는 개념이다. ‘인류세’가 인간 활동이 지구 생태계에 미친 지질학적 환경을 이야기하고, ‘자본세’가 자본주의 체제 팽창이 사회와 자연에 끼친 영향을 조명한다면, ‘무기세’는 군사주의 문명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경고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최재훈, ‘나의 역사적 상처’ 시리즈

최재훈의 ‘나의 역사적 상처’ 연작은 스테인리스 거울에 비친 자신을 향해 작가가 실탄을 사격한 행위의 결과물이다. 총탄에 팬 상처로 거울 표면이 일그러지고 비치는 풍경 또한 왜곡되어 불확실해진다. 작가는 거울에 총을 쏘는 행위로, 자신과 타자의 상처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질문한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상처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정전 상태에서 살고 있는 개인의 무감각한 두려움과 전쟁의 실체적 공포가 빚는 충돌을 이야기한다. 최재훈의 작업은 개인과 공동체의 상처, 공포와 망각을 오간다.

 

안성석, ‘꺼지지 않는 알람 소리’

안성석은 가상과 실제를 넘나들며 시공간을 재조합하고, 장소에 축적된 시간성과 과거의 흔적을 추적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꺼지지 않는 알람 소리’는 탄피가 떨어지는 총소리가 시계 알람 소리와 겹쳐 작품에 긴장감을 더한다. 작품 속 가상의 스테인드글라스 구조물에는 죽음에 가까운 모습의 군인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다. 군복을 입고 생을 마감한 군인들의 이미지는 은폐된 군대의 부조리와 전쟁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그들의 처참한 모습을 통해 작가는 흔한 전쟁 기념비의 영웅적 이미지를 반전하며,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고자 한다. 

 

방정아, ‘핵좀비들 속에서 살아남기’

인류의 종말을 담은 아포칼립스물에서 좀비는 흔히 등장하는 소재다. 좀비는 인간성을 잃고 생존 본능만 남은 폭력적인 존재들이다. 방정아의 작업에서도 좀비는 아무런 인식 능력 없이 핵에너지에 오염된 존재들일 뿐이다. 7m 높이의 4폭 걸개그림 ‘핵좀비들 속에서 살아남기’ 안에는 핵에너지에 기생해 살아가는 좀비들과 그 사이에 숨어 있는 인류 생존자들이 함께 그려져 있다. 방정아는 삶과 땅을 파괴하는 핵발전의 위험성을 사고능력 없이 욕구만 남은 좀비로 그려낸다.

 

오제성, ‘조각에 대한 기억’

오제성은 3차원 스캔과 프린트를 활용해 서로 다른 양식의 조각을 결합하고, 신기술로 이루어진 산업 재료로 과거의 작업을 구현한다. 과거와 현재를 조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조각에 대한 기억’은 세 사람과 어린아이가 머리 위에 무언가를 지거나 손에 무언가를 들고 일렬로 걸어가는 형태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로 연결되는, 조각을 통한 기억은 다사다난했던 한국의 근대사를 나타낸다. 전쟁과 분단, 군사 독재를 거쳐 오늘을 이룬 한국의 현재를 드러내려는 시도다. 

 

투안 앤드류 응우옌, ‘대포 소리, 슬픈 후렴과 같이 익숙한’

영상작품도 눈에 띈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은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에 걸쳐 광범위한 폭격을 감행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공습이 이루어진 전쟁으로 기록됐다. 셀 수 없이 많은 폭탄이 하늘에서 떨어졌고, 그중 상당수가 불발탄으로 아직 고통을 낳고 있다. ‘대포 소리, 슬픈 후렴과 같이 익숙한’에서 투안 앤드류 응우옌은 미군의 아카이브 기록 영상과 베트남 꽝찌 해안 지역의 불발탄 해체 장면을 나란히 보여준다. 불발탄으로 오염된 땅을 치유하고 무고하게 희생된 영혼을 기억하자는 뜻이다. 미군의 선전(선동) 이미지와 사운드,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불발탄의 독백을 통해 작가는 역사적 사실과 애니미즘적인 서사의 영역을 넘나든다. 

 

서울대미술관은 전시 이해를 돕기 위해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26일, 3월26일, 4월24일 오후 2시)에 큐레이터와의 관람을 진행한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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