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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의시읽는마음] 잘 알지도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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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2-10 23:29:27 수정 : 2025-02-10 23:2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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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강

당신이 사 준 책상엔 서랍이 달려 있어요

부드럽게 열렸다 느리게 닫히는군요

내부는 눈부신 빛깔의 자작나무예요

 

당신의 선택이 옳아요 사실은

슬며시 비난했던 그 스피커도 아주 탁월했어요

 

(중략)

 

거대한 수거함 내부 같은 밤

누군가 남기고 간 짐들이 빈 거리에 기어 나오는 밤

 

고급 레일을 사용한 덕분이겠죠

눈은 멈추지 않고 오래 내립니다

 

오늘 저녁엔

이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부드럽게 열렸다 느리게 닫히는 것이

있어서 좋군요

오래된 서랍장 앞으로 다가가 서랍 하나를 열어본다. 그리고 닫아본다. 얼마나 부드럽게 열렸다 느리게 닫히는지, 손끝으로 전해지는 느낌을 가만히 음미해 본다. 평소 서랍 속에 든 것을 꺼내느라 무심코 열고 닫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 어떤 사물에는 “누군가 남기고 간” 흔적이 묻어 있음을 문득 알아차린다. 꼭 “고급 레일을 사용한 덕분”만은 아닐 것이다. 그 흔적이 이토록 긴 시간 지속되는 이유. “부드럽게 느리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지금 여기는 정말이지 “거대한 수거함 내부” 같기도 하다. 한 시기를 지나 남겨진 짐들로 가득한 곳. 그런 짐들에 둘러싸인 채 살고 있는 것일까. 소용을 다한 것처럼, 우리 또한 남겨져 있는 것일까.

 

“부드럽게 열렸다 느리게 닫히는 것.” 이런 것은 아무래도 쉽게 내버릴 수가 없겠다. 흔적을 더듬거리듯 지금껏 너무 오래 너무 많이 열고 또 닫았기 때문.

 

박소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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