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높이조절·음성출력 등 기능
장애인·고령층 접근성 크게 개선
삼성역 인근 등 설치율 10% 안 돼
기존 기기 사용 매장은 교체 유예
자영업자들 “법 바뀐 줄도 몰랐다
가격 두 배… 기기 교체 부담” 토로
“주문하시려면 버튼을 눌러주세요. 다음으로 이동하려면 오른쪽 방향키….”
12일 오후 2시 서울 구로구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30대 강영준씨는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 키오스크 앞에 섰다. 빛을 인지하지 못하는 전맹(全盲) 시각장애인인 그는 키오스크 측면의 점자 안내판에서 ‘음성지원을 위해 이어폰을 꽂아주세요’라는 글을 읽고 이어폰을 착용했다. 이어폰에서는 물리적 키를 이용한 주문방법이 소개됐다. 터치스크린을 사용하기 어려운 시각장애인을 위한 주문방식이다. 강씨가 주문하려는 아이스크림의 메뉴와 가격, 칼로리 등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왔고, 강씨는 잠시 고민한 뒤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소진영 기자
강씨와 같은 시각장애인의 주문을 위해 설계된 이 장비는 ‘배리어프리(Barrier-Free) 키오스크’다. 장애인이나 노약자, 어린이가 사용할 수 있도록 화면이동이나 음성출력, 수어안내, 높이조절 등의 기능이 탑재됐다. 강씨는 “직접 화면을 보고 터치해야 하는 키오스크 주문은 그간 엄두도 못 내던 일”이라며 “배리어프리 키오스크가 생기면서 눈이 보이지 않아도 음식을 주문할 수 있게 됐다”고 기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기점으로 국내 식음료업장의 키오스크 사용이 급증한 가운데, 최근 배리어프리 키오스크가 의무화되면서 강씨와 같은 장애인의 접근성이 크게 개선됐다. 그러나 여전히 배리어프리 키오스크 설치가 부진한 데다 상당수 매장에서는 기기 교체에 따른 가격 부담을 호소하고 있어 제도 안착까지는 시일이 걸릴 전망이다.
18일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에 따르면 2021년 21만33대였던 키오스크는 2022년 45만4741대, 2023년 53만6602대로 2년 만에 두 배 이상 늘어날 정도로 보급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추세다. 키오스크 사용이 늘어나면서 장애인이나 고령층의 사용이 어려워졌다는 지적이 나오자, 정부는 2022년 ‘배리어프리 키오스크’ 설치를 의무화했다.
단계적 확대에 따라 50㎡(15평) 이상 100인 미만 사업장은 지난달 28일부터 신규로 설치하는 모든 키오스크를 배리어프리 기능을 갖춘 기기로 도입해야 한다. 이미 일반 키오스크를 쓰던 매장들도 유예기간이 끝나는 내년 1월까지 배리어프리로 바꿔야 한다. 이를 어길 시엔 최대 3000만원 벌금이 부과된다.
장애인이나 고령층에서는 배리어프리 키오스크 확대를 반기는 모습이지만, 실제 설치는 지지부진하다. 취재진이 이날 서울 강남역, 삼성역, 건대입구역 등 번화가 일대를 확인한 결과, 15평 이상 사업장 33곳 중 배리어프리 키오스크가 설치된 건 3곳으로 10% 미만에 그쳤다. 대부분 일반 키오스크로, 음성 지원과 높이 조절 등의 기능이 없었다. 시각장애인과 노인 등 키오스크 사용이 불편한 이들이 매장을 이용하는 모습도 보기 어려웠다.
자영업자들은 “(법이) 바뀐 줄도 몰랐다”며 정부의 정책 홍보와 설치 비용 지원 등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중소벤처기업부 관계자에 따르면 배리어프리 키오스크 설치 비용은 평균 500만원가량으로, 일반형 키오스크(평균 200만원)와 비교하면 두 배 이상 비싸다. 정부는 설치 비용의 70~80%를 지원하는 사업도 진행했는데, 이 역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지원사업 첫해인 2023년 0대, 지난해엔 191대만 지원받아 설치가 이뤄졌다. 소상공인연합회가 식당, 카페 등 키오스크를 활용하는 업체 402곳을 설문한 결과, 85.6%가 배리어프리 키오스크 설치 의무화에 대해 몰랐다.
삼성역 인근에서 분식집을 운영 중인 강명수(40)씨는 “개정안에 대해 전혀 몰랐다“면서 “전국적으로 다 바꾸라고 강제하면 기존 키오스크를 중고로 팔 수도 없고, 미리 홍보도 하지 않은 정부가 비용마저 충분히 보전해주지 않으면 반발심이 들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여름 삼성동에 카페를 열었다는 40대 사장 조모씨는 “개업 당시 배리어프리 키오스크에 대해 인지하지 못했다”면서 ”이제 1년 안에 기기를 교체하라고 하니 비용이 부담된다”고 말했다. 자영업자들 사이에선 아예 키오스크 자체를 설치하지 않겠다는 반응마저 나온다. 인지도 부족 문제에 대해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이제 올해 사업 대상자에 대한 홍보 등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동명 동덕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장애인 및 고령층 등 모두가 키오스크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 건 사회 구성원으로 당연한 것”이라면서 “(배리어프리 키오스크) 의무화 시점 및 기준에 대해 개정 초창기부터 정부가 상세히 안내를 해야 했다. 키오스크 변경 등 자영업자들의 부담을 덜기 위한 충분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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