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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얇은소설] 생계와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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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2-21 00:04:16 수정 : 2025-02-21 00: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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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류 이민자의 삶을 사는 모녀는
백인 친구의 호의에 마음 여는데
피부색 따라 수직적으로 관계 변질
자존감을 지키고픈 몸부림의 기록

수반캄 탐마봉사 ‘지렁이 잡기’(‘나이프를 발음하는 법’에 수록, 이윤실 옮김, 문학동네)

신간 중에서도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의 소설집, 그것도 첫 소설집을 만날 수 있을 때 가슴이 가장 뛴다. 라오스 난민촌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작가 수반캄 탐마봉사의 첫 소설집 ‘나이프를 발음하는 법’을 주문해 놓고 기다릴 때도 그랬다. 표제작은 성장소설에 관해 이야기할 때, 오헨리상 수상작인 ‘슬링샷’은 노년의 성과 자아를 말할 때, 소중한 기억에 관해서라면 ‘저 멀리 있는 것’이란 단편에 대해 말하고 싶어질 것 같다.

조경란 소설가

마지막에 수록된 ‘지렁이 잡기’는 다른 작품에서보다 작가의 체험이나 자전적 요소가 더 많이 느껴진다. 그만큼 차별받고 살아가는 난민들의 모습이 잘 보여서나 작가가 소설집 전체를 통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더 깊이 느껴져서일까. 아버지는 국경을 넘다 세상을 떠났고 열네 살의 나는 엄마와 둘이 살고 있다. 어느 날 새벽에 엄마가 잠든 나를 깨우며 이제 너도 약간의 여윳돈 정도는 벌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엄마가 일하는 돼지 농장에 일자리를 얻었다고. 정규교육을 받지 못해서 이 나라에서는 육체 노동직밖에는 구할 수 없는 엄마를 나는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은 일이고 “그런 일을 한다고 해서 우리의 존엄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농장에서 엄마가 하는 일은 지렁이 잡기였다. 농장의 유일한 여자 일꾼이었는데 내가 와서 한 명 더 늘었다. 돈을 받고 팔아야 해서 지렁이는 살아 있는 것이어야 하며 땅속에서 손으로 꺼낼 때 중간에 끊어져서도 안 되었다. 내가 잘하기도 어렵고 좋아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그 일이 싫었는데 사람들 앞에서 엄마를 창피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아 참았다.

엄마는 지렁이 잡는 일에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자기만의 방식도 있었다. 수프 깡통에 생쌀을 넣고 다니며 지렁이 한 마리를 잡을 때마다 손가락 끝을 생쌀에 문질러 일정하게 찬 온도를 유지했다. 손에 온기가 있으면 지렁이들이 도망을 간다고. 그래서 장갑도 끼지 않았고 지렁이가 소리에 예민하다며 고무장화 소리를 듣지 못하게 차가운 땅을 맨발로 다녔다. 그렇게 해서 엄마가 잡는 지렁이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엄마는 생계를 잇게 해주는 지렁이를 ‘땅의 똥’ 혹은 ‘금덩이’라고 여겼다. 나에게 댄스파티에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한 다정한 제임스가 조별 과제 일로 집에 왔을 때 그를 밀어내고 싶은 마음에 지렁이 잡을 때 입는 점액으로 얼룩진 작업복을 보여주었다. 뭔가에 한 번도 실패해 본 적이 없는 그의 눈에는 그게 멋지게 보였다.

이제 세 사람이 토요일 새벽마다 돼지 농장에 가서 지렁이 잡는 일을 하게 되었다. 딸의 친구이므로 엄마는 제임스에게 자신의 비법을 죄다 알려주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제임스가 그들의 관리자가 됐다. 엄마가 원했고 바랐던 보수 좋은 자리에. 농장 주인은 영어에 능통하고 남자인 그를 그 역할에 적임자라고 판단한 것이다. 관리자가 된 제임스는 작업 방식을 바꾸어서 생쌀을 톱밥으로 대체했고 고무장화와 장갑 착용을 의무화했다. 엄마 손에 톱밥 가시가 박혀 염증이 심해지고 수확량이 급격히 저조해졌다. 엄마 가슴이 무너지는 게 내 눈에 보였다.

몇 주 후 댄스파티가 열리는 날, 엄마는 내가 입을 드레스를 만들어 펼쳐두었다. 그리곤 제임스가 오기 전에 집을 나갔다. 또래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 가는 걸 마당에서 지켜보면서도 가족을 위해 닭을 키웠던 엄마에게 딸이 댄스파티에 가는 것은 인생의 대단한 일에 속했으니까. 엄마와 나의 농장 상사이자 댄스파트너가 된 제임스. 그가 꽃을 들고 초인종을 누른다. 집에 혼자 남은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생계를 이어가는 일도 자존심을 지키는 일도 쉽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게 가족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면 더더욱. 꿈도 멀어지고 고되고 서글프지만 꿋꿋하게 삶을 이어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이 책에서 확인한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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