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 낮은 사람에게만 희생 강요
145년 전의 몰염치·이기주의
지금도 여전한 것 같아 씁쓸해
기 드 모파상 ‘비곗덩어리’(‘시몽의 아빠’에 수록, 고봉만 옮김, 문학과지성사)
오래전에 읽은 작품을 새 역자의 훌륭한 번역으로 다시 읽고 나서 깜짝 놀라게 되는 경우가 있다. 대체로 고전 소설들인데, 그때는 왜 지금과 같은 눈으로 읽지 못했는지 아쉽기도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 작품 안에 담긴 숨은 뜻을 발견할 수 있는 건 예기치 못한 선물같이 느껴진다. 이 년 전 여름에 출간된 고봉만 옮김의 ‘비곗덩어리’를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다.

적군들이 점령한 도시를 떠나고 싶어서 간신히 여행허가서를 받은 열 사람이 어느 화요일 새벽에 모였다. 말 네 필이 끄는 커다란 승합마차에는 이 지역 부르주아들인 백작, 도의원 등 부부 세 쌍, 여섯 명이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수녀 두 명. 제일 안쪽 자리에는 유지들의 기피 대상인 민주 인사 코르뉘데가, 그 옆에는 “그런 부류의 여자”로 불리며 “뚱뚱한 몸매” 때문에 ‘비곗덩어리’라는 별명을 얻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지위가 높은 세 부인은 서로 의기투합해서 그 여자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대화에도 끼워주지 않았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두 공간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마차 안이다. 열 사람의 목적지로 향하는 이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마차가 눈구덩이에 빠져 끌어올리는 데 시간이 걸려서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던 도시까지 갈 수 없게 되었다. 식당도 없고, 농가에 가서 빵 한 덩어리 구해오는 데도 실패했다. 시간이 지나자 모든 사람이 격렬한 허기에 시달렸다. 눈치를 보던 비곗덩어리가 자신의 의자 아래서 흰 보자기로 덮인 커다란 바구니를 꺼냈다. 목적지에 도착할 사흘 동안의 음식을 미리 준비해 온 것이다. 훈제 고기, 치즈, 빵, 비스킷, 생야채, 과일. 이제야 모든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경멸의 시선이 바뀌어서. 그녀는 기꺼이 자신의 음식을 나누어주었고 체면 때문에 망설이던 사람들이 허겁지겁 먹었다. 바구니는 금세 텅 비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여인숙에서 원치 않게 며칠씩이나 발이 묶여 있던 사람들이 다시 마차에 오르면서 시작한다. 지금 이 첫 장면과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여인숙에 도착했다. 그들의 계획은 하루만 머물곤 다음날 여정을 계속하는 거였다. 여인숙과 그 도시를 지배하고 있던 적군 장교가 비곗덩어리에게 어떤 제안을 했고 그녀는 거절했다. 자신의 애국심과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으니까. 동행자들은 처음엔 그의 제안에 같이 분개해주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장교가 그들을 떠나지 못하게 하자 태도가 달라지고 모두의 욕망과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르주아 남자들의 입장, 아내들의 입장, 수녀의 입장이. 코르뉘데를 제외하곤 아무도 자신들의 목적에 비곗덩어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지 않고 관심도 없었다. 음식을 얻어먹은 후로 부인이라고 불렀던 호칭도 아가씨로 바꾸었다. 그녀를 끌어내려 ‘부끄러운 위치를 자각’하게 하려는 의도로. 그녀가 그들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자 그 호칭은 점차 거칠게 변해갔다. 설득과 회유는 거의 협박에 가까워졌다. 그게 부끄럽고 파렴치한 짓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코르뉘데밖에 없었다.
마침내 비곗덩어리는 희생양이 되었고 닷새 만에 그들은 다시 여행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처음처럼 마차의 가장 안쪽 어두운 자리에 앉은 비곗덩어리를 그들은 어떻게 대했나.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울음을 참으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지위가 높은 그들이 불편해하는 민중가요를. 밤이 올 때까지도 코르뉘데는 끈질기게 휘파람을 불어 비곗덩어리의 울음소리를 가려주었다. 그게 그 공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일이라고 여긴 사람처럼. 코르뉘데의 그 작은 행동이 이 단편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처럼 보인다. 틀린 건 아닌지, 모파상의 스승이었던 귀스타브 플로베르도 코르뉘데라는 인물을 극찬하며 ‘이 작은 이야기는 길이 남을’ 거라고 단언했다. 145년 전의 이야기가 지금도 생생하고 가슴 아프게 읽히는 이유는 집단과 개인의 문제, 몰염치, 이기주의, 희생양, 편견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인 걸까. 이 희생당하고 버려진 여인의 이름은 비곗덩어리가 아니고 ‘엘리자베트 루세’이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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