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든 혁명가든… 역사적 맥락 따져보자
131년 전인 1894년 3월28일 시대의 풍운아 김옥균이 중국 상하이에서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 사건은 이른바 동학란으로 인해 조선 조야가 흔들렸고 청과 일본이 이 난의 확산을 예의 주시하였음에도 김옥균이라는 조선 정계의 거물이 쓰러졌기 때문에 모든 이슈를 빨아들였다. 특히 일본 조야와 언론이 가장 두드러졌다. ‘지지신보’는 김옥균이 피살된 지 이틀도 채 안 된 3월30일, 그의 죽음을 상세하고 비중 있게 보도하였다.
또한 1880년대부터 김옥균과 교류했던 아시아주의자와 정한론자들이 ‘김씨우인회’를 조직하여 김옥균 시신 인수, 장례 집행 등을 담당한다고 과시했다. 심지어 ‘도쿄니치니치신문’에서는 청이 김옥균의 유해를 조선에 보내고 홍종우의 보호를 조선 정부에 맡긴 점으로 보아 이홍장과 이경방으로 대표되는 청나라 권력자가 사주했다는 음모론을 펼치며 이토 내각에 대청강경책을 주문했다. 나아가 일본은 조야 가릴 것 없이 김옥균을 조선의 ‘개화’와 ‘독립’을 위해 분투하다가 쓰러진 비운의 혁명가로 미화했다.

이토 내각으로서는 이런 상황이 일석이조였다. 하나는 중의원에서 내각탄핵상주안이 가결되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위기 국면에서 탈출할 수 있을뿐더러 오래전부터 준비해 오던 청일전쟁을 도발할 수 있는 명분을 쥐게 된 것이다. 더욱이 동학란을 구실로 조선내정에 불법적으로 개입하려던 차에 또 하나의 침략 구실을 확보한 셈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망명객 김옥균의 자국 체류를 부담스럽게 여겨 도쿄에서 1000㎞ 떨어진 태평양의 오가사와라 섬으로 유배 보낸 일본 정부가 이제는 대청강경론에 고무되어 여론에 부응하고자 했고 군부는 배후에서 ‘김씨우인회’ 등을 부추겨 전쟁 분위기로 몰아갔다. 이후 일본은 자신들의 호언대로 청일전쟁에서 불법적인 기습을 통해 승기를 잡았으며 동학농민군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통해 저항의 근거지를 뿌리째 뽑아버렸다. 그리고 이런 가운데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은 친일 역적에서 근대화 선각자로 부활했다. 나아가 일제가 아시아 각국과 미국을 침략할 때 김옥균을 동양평화 실현에 일찍부터 앞장선 인물로 추켜세우며 이른바 대동아공영권론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해방 후 김옥균은 다시 친일파로 소환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곧이어 근대화의 선각자, 비운의 혁명가로 부활하였다. 남한에서는 근대화지상주의에 매몰된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되살아났다면, 북한에서는 사회주의혁명의 전 단계인 부르주아혁명의 실천가로 추앙되며 친일파라는 꼬리표를 떼기에 이르렀다. 물론 일본에서의 평가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의 하수인이든 협력자이든 그가 일본과 매우 밀접하였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김옥균은 1894년 3월 암살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유보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를 추종하는 무리 가운데 이규완, 신응희, 정난교 같은 수많은 친일파가 배출되었다. 이규완의 경우,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한 뒤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다시 망명했다. 곧이어 국내에 재입국하여 고종 폐위를 기도했다가 발각되어 일본에 삼차 망명했다. 드디어 그의 소원대로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폐멸되자 강원도 도장관을 비롯한 여러 고위직을 거치며 친일파로 승승장구했다. 역사에서 가정이 없지만, 만일 김옥균이 1910년 이후까지 살았다면 그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그의 공과를 이제는 근대화지상주의든 혁명단계론이든 여기에 구애치 말고 역사적 맥락에서 따져볼 일이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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